일제강점기에 대처승들이 차지한 사찰을 되찾으려는 비구승들이 1960년 11월 ‘불법에 대처승 없다’는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하는 모습.
일제강점기에 대처승들이 차지한 사찰을 되찾으려는 비구승들이 1960년 11월 ‘불법에 대처승 없다’는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하는 모습.
조선 성종은 흔히 ‘문화군주’로 불린다. 재위 25년 동안 세종의 문화정책을 계승해 문물제도를 정비해서다. 성종 2년(1471년) 반포된 ‘경국대전’은 조선의 기본 법전으로 국가 통치의 기본 방향을 설정하는 준거가 됐고, 조선 사회 안정에 기여했다. 하지만 불교계는 경국대전의 직접적 피해자였다. 경국대전 규정에 따르면 출가하려면 재물(베 20필)을 국가에 내고 예조에서 공인해야 승려가 될 수 있었다. 국가가 공인하는 승려의 수는 3년에 60명으로 제한했다. 주지도 국가에서 임명했고, 사찰이나 암자를 새로 짓는 것도 금지됐다. 승려는 거주와 통행의 자유가 제한됐다.

[책마을] 경국대전 이후 '중'은 스님을 비하하는 단어가 됐다
재야 역사학자 이이화 씨는 《이이화의 이야기 한국불교사》에서 “너무나 가혹한 규정이었다”고 평가했다. 불교에 우호적이던 인수대비와 달리 성종은 사림파와 손잡고 불교를 본격적으로 이단화했다. 출가 제한도 모자라 아예 도첩제를 폐지하자 전국적으로 도첩(승려 신분증)이 없는 승려의 환속사태가 벌어졌다. 성 쌓기, 길 닦기 등 국가의 중요한 역사(役事)에 승려들이 시도 때도 없이 불려나갔다. 승려는 역졸, 나졸 등 일곱 가지 천한 직업으로 꼽혔다. ‘중’이라는 명칭이 사람들에게 천하고 얕잡아보는 명사로 각인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부터라고 한다.

저자는 이 책에서 불교가 이 땅에 처음 전래된 삼국시대부터 고려·조선시대, 일제강점기와 해방 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불교 역사를 어려운 용어 없이 쉽게 설명한다. 그동안 쓰인 한국불교사는 사상사에 치중해 사회사적 접근을 외면해 왔다며 불교의 사회적 역할에 주목한다. 또 기존 책들이 소홀히 다룬 민중불교에 상당한 비중을 두면서 불교의 긍정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승려와 교단의 비리와 파행도 가감 없이 평가의 도마에 올려놓고 민낯을 드러낸다.

흔히 ‘1700년 한국 불교의 역사와 전통’이라고들 한다. 372년 전진 황제 부견이 불상, 경전과 함께 순도 화상을 보내왔고, 고구려 소수림왕이를 공인한 데서 기산한 것으로 실제로는 1646년 역사다. 당시 고구려는 왜 아무 저항 없이 불교를 수용했을까. 정치적 의도가 짙게 깔려 있었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고구려 사회가 분화되면서 단군과 동명왕의 현실감 없는 신화적인 신앙체계가 한계를 드러냈고, 혈연 중심 신앙과 사상으로는 정복전쟁으로 확대된 영토의 백성을 효율적으로 설득하고 지배할 수 없었다. 자비와 평등의 불교 사상은 그런 점에서 매력적이었고, 율령을 통해 왕의 직접 지배를 강화하려는 뜻과도 맞아떨어졌다는 설명이다.

한국 불교는 긴 역사 속에서 숱한 파란곡절을 겪어왔다. 왕과 왕실, 귀족과 결탁해 그 보호 아래 교세를 넓히고 문화를 꽃피우며 정신문화를 살찌웠지만 부정적인 측면도 적지 않았다. 수많은 절을 짓고 불상과 종을 만들려면 경제적 부담이 만만찮았다. 이차돈을 기리는 백률사를 창건할 때 신문왕은 밭 1만 뙈기를 하사했고, 경덕왕은 성덕대왕신종을 조성할 때 구리 전량을 대줬다.

불교가 흥성함을 넘어 타락상을 보인 적도 많았다. 고려 말엔 절에 하사된 토지와 세금을 승려들이 사리사욕을 채우는 데 사용하고, 귀족들과 뇌물을 주고받기도 했다. 사찰에선 세금을 내지 않기 때문에 귀족의 재산 도피처로도 악용됐다. 억불로 고통받던 조선시대에도 “중과 일반 백성이 뒤섞이고 양인과 도둑이 한데 섞여 결탁해 나쁜 짓을 하며 겁탈을 일삼는 등 못하는 짓이 없다”(중종실록)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래도 불교가 면면히 역사를 이어온 것은 부패와 정화, 존경과 핍박을 반복하며 나름대로 기여한 덕분이다.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목숨을 내놓고 지킨 호국불교, 자비에 바탕한 보시행, 불교가 부패와 타락에 젖었을 때 자정 능력을 발휘하며 승려들이 자발적으로 개혁을 도모했던 결사(結社)의 전통이 그런 사례들이다. 보조지눌의 수선결사는 송광사에서 16명의 국사를 낳은 원동력이었고, 해방 후 문경 봉암사 결사는 일제강점기에 망가진 한국 불교를 되살린 결정적 계기였다.

1937년 미나미 지로(南次郞) 조선총독부 총독이 본산 주지회의를 소집, 조선 불교와 일본 불교가 하나 되는 방안을 찾아달라고 요청했다. 그러자 만공 스님이 벌떡 일어나 총독부 회의실이 떠나갈 정도로 일갈했다. “부처님이 이르시기를 청정 비구 하나를 파계시키는 것도 무간지옥(無間地獄)에 떨어진다고 하셨거늘, 조선 승려 7000명을 파계시킨 데라우치 전임 총독은 지금 어디에 가 있겠는가.” 독신수행의 전통을 깨뜨리고 대처(帶妻)를 장려하는 친일, 왜색 불교를 강요한 데 대한 사자후였다. 만공은 마곡사 주지 자리를 미련 없이 던지고 덕숭산 정혜사로 돌아갔다. 최근 숱한 논란 끝에 사퇴한 조계종 총무원장이 돌아간 곳이 이 정혜사다. 역사의 아이러니다.

서화동 문화선임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