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소 화백이 서울 사간동 갤러리 현대에 재연한 1973년 행위미술 ‘선술집’을 설명하고 있다.
이강소 화백이 서울 사간동 갤러리 현대에 재연한 1973년 행위미술 ‘선술집’을 설명하고 있다.
1970년대 한국 화단에선 단색조 회화가 유행처럼 번졌다. 유럽의 앵포르멜과 미국 미니멀리즘, 일본의 모노하(物派) 등 추상미술의 영향을 받은 결과였다. 당시 한국의 젊은 작가들은 외래 사조의 모방적 미술에 도전장을 던지며 개념미술, 행위예술, 설치미술 등 다양한 실험을 시도했다.

서울대 미대를 갓 졸업한 20대 청년 이강소 역시 실험적 미술에 빠져들었다. 1970년 탈장르 예술가 집단 ‘신체제’ 그룹을 결성한 그는 AG(아방가르드협회)그룹전에 참여하고 ‘해프닝’이나 ‘이벤트’ 형식의 한국 특유의 행위미술을 본격 쏟아냈다. 1973년에는 서울 명동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열어 ‘소멸’을 테마로 전시장을 술집처럼 꾸몄다. ‘선술집’이란 입간판을 내걸고 관람객에게 막걸리, 안주를 제공하며 단절된 사회의 소통을 제안했다. 1975년 제9회 파리청년비엔날레에선 전시장에 닭을 풀어놓은 퍼포먼스로 유럽 미술계에 신선한 충격을 줬다.

◆한국 행위미술의 재조명

실험적 행위미술을 국내외 무대에 소개하던 청년이 이제 인간의 본질, 역사와 현실을 꿰는 추상미술을 붙들고 정진하는 75세의 백발이 성성한 화가가 됐다. 지난 24일 서울 사간동 갤러리 현대에서 시작한 ‘이강소-소멸’전은 1970년대 작업한 다양한 그의 아방가르드 예술을 40여 년 만에 다시 펼쳐보이는 자리다. 작가의 실험 정신과 식지 않는 열정은 물론 최근 국제 미술계가 관심을 보이는 한국 행위미술의 본질을 탐구하고 재조명하는 성격의 전시회여서 더욱 주목된다.

오는 10월14일까지 이어지는 이 전시회에는 ‘닭 퍼포먼스’ ‘선술집’뿐만 아니라 석고와 시멘트로 갈대를 박제한 작품, 누드 퍼포먼스, 사과 유통 과정을 담은 이벤트 등 10점과 당시에 촬영된 기록사진이 나와 있다. 회화 조각 등 전시가 끝나도 작품이 남는 다른 시각예술 분야와 달리 기록으로만 존재해온 행위예술의 묘한 매력을 감상할 수 있다.

26일 전시장에서 만난 이 화백은 “세계 미술무대에서 한국이라는 국가가 가진 미학적 정체성은 무엇인지, 어떻게 서구와 다른 독자성을 획득할 것인지에 대한 사유와 실험, 고민을 재현했다”며 “현대미술이란 누구나 느낄 수 있고 쉽게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멍석을 까는 작가입니다. 이후는 관람객 몫이지요.”

세월은 흘러 세상이 변했지만 전시장에서는 40여 년 전 사회적 이벤트와 해프닝을 다룬 작품들이 한국 미술의 정체성을 관통하며 서사적인 매력을 뿜어낸다. 1971년 제2회 AG그룹전에 출품한 ‘여백’은 낙동강 일대의 갈대를 흰 석고와 시멘트로 형상화해 박제된 자연을 통해 상실과 죽음의 이미지를 상기시킨다. 작가는 “1970년대의 정치적 현실을 마주할 때 오는 허무감, 존재감, 세계를 보는 회색적 시각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며 “실존의 문제를 다룬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1974년 대구에서 열린 ‘한국실험작가’전에 출품한 사과 유통 퍼포먼스 ‘생김과 멸함’도 재현했다. 전시장에 ‘1개에 2000원’이란 제목을 붙인 다음, 멍석에 사과 200여 개를 쌓아 두고, 유니세프기금 마련을 위해 지폐나 동전을 담을 그릇을 배치했다.

◆행위미술에서 탄생한 추상회화

이 화백의 퍼포먼스와 영상작품에는 그림을 평생 붙들어 매겠다는 몸부림 같은 게 묻어 있다. 작가가 1977년 직접 참여한 누드 퍼포먼스 ‘회화’는 흑백사진으로 ‘소환’했다. 벌거벗은 자신의 몸에 물감을 칠하고 캔버스 천으로 닦아낸 흔적을 통해 회화의 본질을 파고들었다. 유리에 물감을 칠하는 화가의 모습을 담은 같은 제목의 비디오 영상작품 ‘회화’ 역시 그림의 원초적 생명력을 가볍게 터치한다. 빨강, 파랑, 검정 등 다양한 물감이 유리에 칠해질수록 화가의 모습이 물감에 가려 화면에서 점점 사라져가는 게 흥미롭다.

1943년 대구에서 태어난 이 화백은 1970년대 다양한 퍼포먼스와 실험적인 작업들을 거친 뒤 평면 회화, 조각, 사진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작업해왔다. 1980년대 후반 평면 회화에 몰두한 그는 캔버스를 헤엄치는 오리를 즐겨 그려 일명 ‘오리 작가’로 유명해졌다. 회색의 선과 면으로 유려하게 그려진 ‘오리 그림’은 인간의 행위(묘사)는 물론 문학적 스토리(질감)와 철학까지 추상적 색채미학으로 아울렀다. 미술평론가들이 ‘이 화백의 그림을 관찰자의 상상력을 잔잔한 호수에 드리우도록 절묘하게 매혹하는 시인의 서정적 판타지’라고 평하는 까닭이다.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