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우월한 유전자의 힘? 실체 없는 과장일 뿐
많은 사람이 부모의 키를 자식이 그대로 물려받는다고 생각한다. 유전자가 신체적 조건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생각이 이런 사고의 바탕에 깔려 있다. 그런데 한국인의 남녀 평균 신장은 1945년 166.5㎝, 154㎝에서 2015년 173.5㎝, 160.9㎝로 크게 성장했다. 그동안 키 큰 외국인의 피가 특별히 많이 섞인 것도 아닌데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키 큰 사람만 결혼해서 자녀를 낳는 데 성공한 ‘자연선택’의 영향도 아닐 텐데 말이다.

두말할 나위 없이 영양 섭취 상태 등 환경이 바뀐 영향이다. 이런 명백한 증거를 눈앞에 두고도 최근 급성장하기 시작한 유전공학은 유전자가 인간의 외모, 성격, 사고방식, 질병 등 모든 걸 결정짓는다고 퍼뜨리고 있다. 스티븐 하이네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대 문화심리학과 교수는 《유전자는 우리를 어디까지 결정할 수 있나》에서 이런 유전자 결정론을 반박한다. 저자는 “어떤 사람이 성인이 됐을 때 얼마나 클지는 유전자에 직접 기록돼 있지 않다”며 “실제로는 유전자와 환경이 상호작용하는데 이런 상호작용이 유전적 영향으로 뭉뚱그려지면서 유전적 영향이 과장됐다”고 강조한다.

유전자 결정론을 반박하는 또 다른 근거를 보자. 저자는 수년 전 미국 뉴욕타임스의 한 기자가 복수의 유전자 검사 업체에 검사를 의뢰했던 사례를 소개한다. 이 기자는 검사 결과 미국 1위 업체 23앤드미에서 건선과 류머티즘 관절염 위험이 크다는 통보를 받았다. 반면 제네틱테스팅래버러터리는 그 기자가 걸릴 가능성이 가장 낮은 질병으로 이 둘을 꼽았다. 선데이타임스의 또 다른 기자는 23앤드미에서 낙설녹내장 발병 위험이 높다는 결과를 받았지만 디코드미에서는 정반대의 얘기를 들었다. 저자는 “소비자에게 유용한 정보를 제공한다는 유전자 검사 업체들의 주장은 과장광고”라고 말한다.

유전자 결정론이 미치는 영향은 잘못된 소비 정도로 끝나는 게 아니다. 역사적으로 그것은 정치적 재앙을 몰고 오기도 했다. ‘정치가 개입해서 인간 유전자를 적극적으로 개량해야 한다’는 우생학은 2차 세계대전 때 홀로코스트를 뒷받침하는 철학이었다. 독일 나치만 이런 생각을 한 것도 아니었다. 윈스턴 처칠 전 영국 총리는 “우리 인종은 정신박약자의 증식이라는 끔찍한 위험에 처해 있다”는 발언을 했다. 시어도어 루스벨트 전 미국 대통령은 “우리가 언젠가 자신의 핏줄을 세상에 남기는 일이 모범 시민으로서 피해서는 안 될 주요 임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우생학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유전자 결정론은 ‘정밀의학’이라는 옷을 입고 우리 곁으로 다시 돌아왔다. 하지만 저자는 비관하지 않는다. 그는 “우리 마음이 세상을 편향된 시각으로 보는 경향이 있기는 하지만 여기까지가 우리의 한계는 아니다”며 “이런 편향 가운데 대다수는 훈련을 통해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양병훈 기자 h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