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에 살던 소년은 서울에 있는 중학교로 진학했다. 마차가 다니던 고향과 달리 서울의 주요 교통수단은 전차였다. 전차를 타면 어디에서 내려야 할지 몰라 늘 불안했다. 어느 날 모든 전차는 동대문을 지난다는 것을 알았다. 그 뒤로는 길을 잃어도 동대문만 찾으면 된다고 생각하니 공포가 사라졌다. 스스로 한 발견은 자신감의 원천이 됐다. 《아이디어로 길을 열다》에서 저자는 “이 경험은 문제를 발견하고 해결책을 찾는 방향등이 됐다”며 “어떤 문제든 생각하고 또 생각하다 보면 그 문제만의 ‘동대문’을 찾을 수 있다”고 조언한다.

[책마을] '실패할 자유' 있어야 창조적 아이디어 생긴다
1938년생인 저자는 서울대 경제학과와 행정대학원 졸업 후 한국전력공사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상공부와 재무부 등 정부 경제부처에서 나라의 수출진흥정책을 입안하고 추진하는 일에 참여했고 신용보증기금 전무, 신보창업투자 사장 등을 거쳐 퇴임한 뒤에는 여러 공·사기업에서 감사, 사외이사로 활약했다. 책은 45년간의 직장생활에서 고비마다 자신만의 ‘동대문’을 찾은 경험의 기록을 담았다.

상공부 수출진흥과에서의 성과 및 신용보증기금 출범 창립 멤버로 참여해 경험한 위기와 보람뿐 아니라 한국에서 벤처 붐이 일기 시작할 시기에 벤처캐피털 사장을 맡아 처음 영화산업에 투자한 일화가 눈길을 끈다. 1994년 아마겟돈이라는 법인을 설립하고 신보창업투자가 투자를 결정했다. 제조업을 중심으로 투자해온 관행을 깨고 벤처캐피털이 국내 최초로 영화산업에 투자한 것이다. 저자는 “‘창투사’답게 ‘벤처’를 하기로 마음먹었다”며 “모든 투자에는 리스크(위험)가 따르고 이를 감당하려는 모험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었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당시 영화는 20만 명의 관객이 들며 화제를 모았지만 11억원의 손실을 냈다. 하지만 그 투자는 영화를 주요 산업의 하나로 보는 계기가 됐다. 이후 영화업계의 자금조달 방법이 바뀌면서 문화적, 경제적 파급 효과도 컸다.

풀무원 감사 시절에는 창업자인 사장이 제안한 계열사 지원을 이사회에서 무산시켰고, SK 사외이사로 재직할 당시엔 대우조선해양 인수전에 뛰어든 포스코의 컨소시엄에 참여하는 방안을 이사회에서 토론을 통해 철회시키기도 했다. ‘쓴소리’를 할 수 있는 사외이사, 토론이 가능한 기업문화는 개인의 아이디어를 실행할 수 있게 하는 조직의 힘이다. 저자는 “아이디어만큼 중요한 것이 조직 그 자체”라며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게 하려면 ‘실패할 자유’도 줘야 한다”고 강조한다. 1960년 이후 한국 경제의 격동기를 보낸 치열한 경험을 ‘평범한 직장인의 기록’이라는 겸손한 책 소개로 대신한 저자는 퇴임 후에도 초등학생들에게 경제교육으로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윤정현 기자 hi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