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의 그물

조홍식 지음 / 책과함께 / 680쪽│2만8000원
렘브란트가 1632년에 그린 ‘유로파의 납치’. 황소로 변신한 제우스가 페니키아의 유로파 공주를 납치해 달아나고 있다. ‘유럽’이라는 말이 여기서 나왔다.  /책과함께 제공

렘브란트가 1632년에 그린 ‘유로파의 납치’. 황소로 변신한 제우스가 페니키아의 유로파 공주를 납치해 달아나고 있다. ‘유럽’이라는 말이 여기서 나왔다. /책과함께 제공

폴란드 출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모국어와 라틴어 외에도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등 10개 언어를 구사했다. 그리스 출신 가수 나나 무스쿠리는 7개 유럽 언어에다 일본어도 한다. 2012년 한 조사에 따르면 유럽인의 10%가 세 개 이상의 언어를 구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유럽인은 타고난 언어 천재들인가. 유럽 전문가인 조홍식 숭실대 교수는 《문명의 그물》에서 유전적 요소나 교육 방식보다 중요한 유럽의 특징은 언어의 상호 유사성이라고 설명한다.

유럽 언어군은 크게 셋으로 나뉜다. 고대 유럽의 동북쪽에서 생활하던 게르만어군, 주로 지중해 부근 라틴계 국가들이 사용하는 로망스어군, 동유럽의 슬라브어군이다. 게르만어군에는 영어·독일어·네덜란드어·스코틀랜드어·덴마크어·스웨덴어·노르웨이어·아이슬란드어 등이, 로망스어군에는 프랑스어·이탈리아어·스페인어·포르투갈어·루마니아어 등이 포함된다. 거스 히딩크 감독처럼 네덜란드인들이 영어를 잘하고, 프랑스 사람들이 이탈리아어를 쉽게 배우는 이유다.

조 교수는 이 책에서 ‘유럽이란 무엇인가’란 질문을 던진다. 그러면서 다양한 민족과 국가로 이뤄진 유럽의 정체성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문명’이라는 개념으로 봐야 한다고 강조한다. 여기서 문명은 단순히 지리·정치적 공동체를 뛰어넘는 문화의 동질성을 가진 집합이라는 의미다.

[책마을] 유럽이 박물관 천국 된 이유, 의인화 전통에 있었네

저자는 프랑스 역사학자 페르낭 브로델이 제시한 문명의 네 가지 기둥(공간·사회·경제·문화)을 유럽문명의 12가지 대표 키워드로 확장한다. 언어·종교·표상·음악·대학·지배·전쟁·도시·자본·평등·교류·축구다. 아울러 문명을 ‘그물’이라는 이미지와 비유로 설명한다. 중학교는 아프리카 가봉에서, 고등학교부터 박사과정까지는 프랑스에서 공부한 저자가 펼쳐 보이는 각각의 그물들은 그의 표현대로 ‘통합유럽의 만화경’처럼 다양하고 흥미진진하다.

18세기까지도 유럽의 공용 문어(文語)는 라틴어였다. 하지만 긴 역사에서는 언어의 헤게모니도 변화한다. 르네상스 시기엔 이탈리아어가 국제공용어로 부상했고, 그 후 프랑스가 유럽 문화의 중심으로 부각되자 프랑스어가 유럽 전역에 확산됐다. 산업혁명으로 영국이 식민지 확보 경쟁에서 승리하자 영어가 주도권을 잡았다.

유럽의 역사는 기독교와 불가분의 관계다. 지금도 기독교도는 유럽의 다수를 차지한다. 하지만 현대 유럽문명을 기독교 중심으로 정의해선 안 된다고 저자는 경계한다. 21세기 들어 유럽연합의 헌법 제정 논의가 시작됐을 때 폴란드는 헌법 전문에 유럽연합의 정체성은 기독교임을 명시하자고 주장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국가들은 반대했다. 이슬람, 유대교 등 다른 종교를 배제하면 유럽연합이 포용의 공동체가 아니라 배타적 집합으로 돌변하고 분열될 수 있어서였다. 유럽문명에 깔린 다양성과 관용정신을 보여주는 사례다.

유럽문명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그림, 조각, 공연 등으로 나타나는 표상의 문화다. 그 핵심은 의인화의 전통이다. ‘정의의 여신’ 유스티시아(Justicia), ‘승리의 여신’ 빅토리아가 대표적이다. 유럽·아시아·아프리카 등 대륙을 여성으로 표현한 점도 주목할 만하다. 유럽이라는 이름은 ‘유로파’라는 페니키아 공주 이름에서 비롯됐다. 유로파가 유럽 대륙으로 온 것은 황소로 변신한 제우스가 공주를 납치했기 때문이다. 기독교 성인을 표시하는 엠블럼, 개인이나 가문을 상징하는 문장(紋章)도 빼놓을 수 없는 표상이다. 표상의 문화가 유럽을 박물관 천국으로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저자는 언어와 종교, 미술, 음악, 학문 등 문화 영역에 이어 왕족과 귀족의 지배, 전쟁, 도시의 형성과 발달, 시장과 자본주의의 발달, 교통과 통신 발달에 따른 교류와 소통 등으로 다양하게 문명의 그물을 펼쳐놓았다.

마지막 그물은 뜻밖에도 축구다. 영국과 프랑스는 유럽에서 문명화의 선두를 달렸지만 신체활동에 관해서는 다른 길을 걸었다. 이성과 합리주의를 표방한 프랑스는 신체활동을 정신활동보다 열등하게 여겼다. 반면 영국에서는 운동이 엘리트 교육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특히 18세기 영국 명문 사립학교들이 폭력적이었던 길거리 축구에 규칙을 더해 학교의 전통으로 발전시키면서 근대적 틀을 갖췄다. 축구가 영국 전역을 넘어 유럽, 세계로 확산된 과정에 얽힌 이야기들이 흥미롭다.

서화동 문화선임기자 firebo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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