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뉴욕 맨해튼의 소호 오픈하우스 갤러리에서 현지인들이 다양한 한국 화장품을 살펴보고 있다. /한경 DB
미국 뉴욕 맨해튼의 소호 오픈하우스 갤러리에서 현지인들이 다양한 한국 화장품을 살펴보고 있다. /한경 DB
상품에 대한 선택의 폭이 넓어지면서 사람들은 오히려 선택을 더 안 하게 됐다. 채널이 다양화됐지만 신흥 미디어 공룡의 지배력은 더 커졌다. 물질적으로 풍족해졌음에도 혼인율과 출산율은 떨어지고 있다. 온라인을 통해 수많은 사람과 언제든 연결될 수 있지만 진득한 관계는 줄어들었다.

[책마을] 2인자 남편·단백질族… 미래 바꿀 '작은 변화'는 진행 중
《마이크로트렌드X》를 쓴 마크 펜은 이런 모순적인 상황이 연출되고 있는 것은 마이크로트렌드들이 각기 다른 방향으로 힘을 발휘하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경영전략 전문가인 저자는 마이크로소프트 광고총괄 부사장, 광고회사 최고경영자 등을 지냈다. 지금은 여론조사기관 해리스폴 회장을 맡고 있다. 그가 2008년 낸 책이 《마이크로트렌드》다. 마이크로트렌드는 사회 전반에 흐르는 거대한 기류인 메가트렌드의 반대편에 있다. 작은 집단들 속에서 일어나는 조용한 변화를 의미한다. 사소한 듯 보이지만 강한 힘을 발휘하는 패턴이다. 저자는 ‘인상주의 화가의 그림 속 점’에 비유했다. 한 걸음 물러서야 전체를 볼 수 있다.

10년 전 저자는 ‘99%를 이끄는 1%의 흐름’이라는 의미에서 마이크로트렌드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맞춤형 상품, 무한한 정보, 스타트업(신생 벤처기업)의 성장 등 맥을 제대로 짚었지만 변화의 결과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렀다. 양극화와 쏠림의 심화, 기술의 위협과 새로운 유형의 사기꾼 등장 등이 대표적이다. 어찌 보면 《마이크로트렌드X》는 《마이크로트렌드》를 내놓은 이후의 10년을 지켜본 저자의 자체 수정안이다.

이번 책에서 저자는 사랑과 관계, 건강과 식습관, 기술과 생활, 정치와 일 등 6개 분야에서 50가지 마이크로트렌드를 정리했다. ‘2인자 남편’ ‘은발의 독신남’ ‘약 먹는 아이들’ ‘디지털 재단사’ ‘행복한 비관주의자’ 등 목차부터 흥미를 더한다. 탄탄한 통계자료들이 소소한 트렌드를 설득력 있게 뒷받침한다.

작은 물줄기를 알면 표면으로 드러나는 큰 변화의 방향을 짐작할 수 있고 곳곳에서 일어나는 균열의 밑바닥에서 권력 이동이 어떻게 이뤄지는지 엿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친단백질족’에서는 단백질 마니아의 증가 추세를 다룬다. 탄수화물보다 단백질, 붉은 고기보다 닭고기 같은 화이트미트를 선호하는 현상이다. 농부에게는 나쁜 소식이지만 목축업자에게는 좋은 일이다. 저자는 “밀 농가와 목축업자 사이의 분쟁은 서양 세계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벌어졌던 큰 전쟁 가운데 하나이고 지금도 진행 중”이라며 한 집단에서 다른 집단으로 권력이 넘어가는 원인과 과정 이면에 자리잡은 마이크로트렌드의 존재를 시사했다.

저자가 분석한 마이크로트렌드에 비친 한국의 모습도 눈길을 끈다. 미국뿐 아니라 영국, 일본 등에서 가정 내 주요 부양자로 아내의 비중이 늘어나는 현상을 언급하면서 “이 트렌드에 큰 영향을 받고 있는 나라가 한국”이라고 소개한 부분이다. 하지만 남녀 소득 격차가 크고 여성이 아이를 낳고도 경력을 계발할 수 있는 노동정책이 아직 자리를 잡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이대로 가면 한국인들은 제대로 된 대비 없이 어느날 갑자기 불편한 진실에 눈을 뜨게 될 것”이라는 저자의 경고가 아프게 다가온다.

4부 ‘생활’편에서는 트렌드 제목 자체가 ‘코리안 뷰티’다. 미국에서 인기를 얻고 있는 한국산 마스크팩과 립틴트, 달팽이크림 등을 앞세워 “몇 년 사이 한국은 미용과 피부관리 트렌드를 주도하는 국가로 급부상했다”고 평가한다. 저자는 한국식 ‘물광 피부’가 건강뿐 아니라 재력과 우월함을 과시하는 새로운 상징으로 자리잡았다는 것에 주목한다. 화장품에 이어 한국식 성형수술 열풍이 일 것도 예상했다. 세계에서 안면 및 두부 수술을 가장 많이 하는 나라 1위가 브라질이고 2위 미국, 그 다음이 한국이라는 통계를 곁들였다. 저자는 “머지않아 성형 수술을 하러 한국으로 줄줄이 휴가를 떠나는 서양인들을 보게 될지 모른다”며 “세계에서 피부관리에 가장 많은 돈을 쓰는 한국 남성들을 볼 때 앞으로 미국 남성들도 미용에 굶주린 고객이 될 수 있다”고 내다봤다.

책에 담은 50개의 마이크로트렌드로 오늘의 세계를 다 설명하기는 어렵다. 다만 다양한 분야에서 일어나는 변화의 단면을 이해하는 데는 도움이 된다. 그 변화가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를 넘어 사회의 균열을 막을 방안의 필요성을 각인시켜준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강한 마이크로트렌드 기류들의 충돌은 더 심해지는 가운데 “기업들은 시장의 여건과 트렌드에 놀랄 만큼 기민하게 반응하지만 정부는 변화를 따라가지 못한 채 뒷북만 울리고 있다”는 저자의 지적도 한국의 현실을 되돌아보게 하는 부분이다.

윤정현 기자 hi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