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탄섬은 화려한 볼거리 대신 아름다운 자연을 만끽할 수 있는 여행지다.
바탄섬은 화려한 볼거리 대신 아름다운 자연을 만끽할 수 있는 여행지다.
파란 바다 위에 얹힌 초록 언덕, '세상의 끝'이라 불리는 天國의 섬… 느릿느릿~ 시간의 사치를 누리다
바타네스주는 필리핀의 가장 작은 주로 최북단에 있는 10개의 작은 섬으로 이뤄져 있다. 지도에서 보면 필리핀보다 오히려 대만 쪽에 더 가깝게 붙어 있다. 대만 남단에서 190㎞, 마닐라에서 860㎞ 떨어져 있다. 바타네스의 관문은 주도인 바스코(Basco)가 있는 바탄섬(Batan Isaland)이다. 바타네스주의 10개 섬 중 3개는 유인도, 7개는 무인도다. 3개의 유인도 가운데 하나인 바탄섬에서부터 바타네스 여행은 시작된다. 이곳에 바스코공항이 있기 때문이다. 바스코공항은 공항이라고 부르기 민망할 정도로 작다. 마닐라에서 출발한 작은 비행기는 시골 정거장 같은 바스코공항에 한 시간 반에서 두 시간 만에 도착한다. 마닐라~바탄섬 국내선 비행기값이 평균 7000페소(약 18만원), 비쌀 땐 1만5000페소(약 36만원)까지 올라가니 그도 만만치 않다. 이 비행기가 유일한 교통편이니 필리핀 사람들에게 이곳은 지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도 해외보다 멀다. ‘세상의 끝’이라 불리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세상의 끝, 바타네스

여행객은 마닐라에서 숙박까지 하며 오전 출발하는 바스코행 국내선을 타야 하니 추가로 드는 비용도, 시간과 에너지 소요도 감수해야 한다. 딱히 큰 볼거리가 있는 곳도 아니고 바타네스는 가성비가 떨어지는 여행지임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타네스를 가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이 무엇일까? 도대체 바타네스에 가는 사람들은 무슨 마음으로 가는 걸까?
바탄섬 여행 중 길 위에서 마주친 소 무리
바탄섬 여행 중 길 위에서 마주친 소 무리
“거기에 뭐가 있어요?” 다녀온 뒤에도 나는 설명을 하지 못한다. 그저 당신도 가보라는 말밖엔. 소설책을 네 권 들고 갔으나 결국 한 권도 못 읽고 왔다고 했던 어느 여행자의 말을 빌리자면 “도시에서 하던 독서와 달리 문장 하나를 읽고 멈춰서 생각하고 단편 하나를 읽고 멍때리게 되는 곳, 별 것 아닌 식사를 하는데도 두 시간씩 소처럼 되새김질하면서 씹어 먹게 되고, 포크를 놀리는 손동작도 굼떠진다. 이곳에서 할 수 있는 가장 큰 혜택은 멍때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라고 회상한다. 그렇다. 바타네스는 필자가 아는 여행지 중 가장 멍때리기 좋은 곳, 매일 달콤한 낮잠을 잘 수 있는 곳, 매일 아침 상쾌하게 눈을 뜬 곳이었다. 하루하루를 분 단위로 쪼개 쓰는 사람이라면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특별히 자랑할 것도 없는 바타네스를 처음부터 여행지로 선택하지도 않겠지만, 살다 보면 아무 쓰잘데기 없는 일을 하며 시간의 사치를 부리고 싶은 날이 있다. 그런 날이 온다면 바타네스 여행이 아주 극단적인 좋은 선택이다.
파란 하늘과 초원이 여유로운 풍광을 선사하는 바탄섬
파란 하늘과 초원이 여유로운 풍광을 선사하는 바탄섬
파랑과 초록, 눈 호강하는 섬

바탄섬의 소박한 간이식당
바탄섬의 소박한 간이식당
바탄섬은 바타네스 섬 10개 중 두 번째로 크다. 95㎢니 겨우 제주도의 20분의 1 정도다. 바탄섬을 여행하는 방법은 시간이 많다면 자유여행, 여유롭지 못하다면 현지여행사가 제공하는 투어 프로그램을 이용하는 것이다. 투어는 2박3일부터 4박5일까지 선택할 수 있는데, 보통은 섬을 두 지역으로 나눠 하루는 북부, 하루는 남부 순으로 둘러보게 된다. 추가로 하루나 이틀은 이웃 섬 탐방, 하루는 자유일정으로 잡는 게 보통이다. 관광 인프라가 크게 발전하진 않았지만 필리핀 정부에서 이 지역을 보호하고 있는 만큼 현지인으로 구성된 훌륭한 지역 관광 가이드들이 지역의 문화와 자연을 잘 설명해준다. 화려한 호텔과 유명한 볼거리는 없는 대신 아름다운 자연과 순수한 사람들인 이바탄(Ivatan)과 만나 그들의 사는 모습을 여과 없이 보면서 하루 정도 지나면 마음이 저절로 풀어지고 느슨해진다. 바타네스 사람들을 특별히 이바탄이라고 구분지어 부르는데, 이들은 필리핀 다른 지역과는 문화, 인종이 완전히 다르다. 생김새로 보면 대만인과 더 닮아 있는 이바탄은 자신들의 고유 언어인 이바탄어를 사용하며 아직도 산호와 석회암을 사용해 전통방식으로 지은 가옥에 마을 단위로 무리 지어 살고 있다. 다른 지역에서 오는 이민을 허용하지 않으니, 섬의 인구는 1만7000명 내외, 더 이상 크게 늘지도 줄지도 않는다.
자갈이 깔려 더 맑아 보이는 바탄섬의 볼더비치
자갈이 깔려 더 맑아 보이는 바탄섬의 볼더비치
느슨하고도 느슨한 바탄섬 투어는 예를 들면 이렇다. 언덕, 또 다른 언덕, 초원, 또 다른 초원, 바다가 보이는 절벽, 절벽 아래 펼쳐지는 바다, 아주 작은 성당, 조금 더 큰 성당, 그리고 언덕 위의 등대, 또 다른 언덕 위의 등대 등을 다니며 유유자적하게 하루를 유영하는 것이다. 푸름으로 그득한 바다 위에 얹힌 초록 언덕들 위엔 어김없이 염소와 소, 말들이 이 땅의 주인인 양 반긴다.
필리핀해를 조망할 수 있는 나이디 언덕의 바스코 등대.
필리핀해를 조망할 수 있는 나이디 언덕의 바스코 등대.
성당이 많은 것은 400년 동안 스페인의 지배를 받았던 영향이다. 95%가 로마 가톨릭 인구이고 마을마다 가장 좋은 자리에 성당이 있어 사람들의 삶의 일부분이 되고 있다. 성당 건축 양식을 보면 이바탄 전통 가옥과 유럽의 건축 양식이 절묘하게 섞여 있어 재미를 더한다. 하얀 등대는 바탄섬의 초록 언덕들과 파란 바다와 멋진 조화를 이룬다. 섬 동쪽에 있는 타이드 등대와 조망이 훌륭한 나이디 언덕에 있는 바스코 등대가 대표적이다. 등대는 올라가봐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바스코 등대 5층에서 시원하게 펼쳐지는 필리핀해와 이라야 산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바타네스 최고의 숙소인 펀다시온 파시타 바타네스 네이처 로지
바타네스 최고의 숙소인 펀다시온 파시타 바타네스 네이처 로지
이바탄의 피카소, 파시타아바드의 자취를 찾아

체인 호텔에 익숙한 이들은 바스코 시내에 있는 민박 수준의 숙소들을 보고 실망할 수도 있다. 화려하고 웅장한 호텔은커녕 요즘 유행하는 작고 세련된 숙소들도 찾을 수가 없다. 그리고 앞으로도 오랫동안 그럴 것이다. 생각해 보면 세상에 모든 아름다운 곳엔 유명 체인 호텔이나 골프장, 관광 시설이 있기 마련인데, 단 하나도 없다는 것이 오히려 바탄섬의 매력이 됐다. 거대 자본이 비켜간 바스코 시내의 소박한 숙소들은 식당까지 겸하고 있어 이바탄 스타일의 음식들을 매끼 즐길 수 있다. 이런 바탄섬에 유일하다시피한 고급 호텔이 있다. 2004년 타계한 세계적인 아티스트, 파시타아바드의 집을 개조한 ‘펀다시온 파시타 바타네스 네이처 로지(Fundacion Pacita Batanes Nature Lodge)’다. 파시타아바드는 1946년 바스코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고, 다소 늦은 나이인 30세에 그림을 시작했다. 집시처럼 전 세계를 누비고 다니며 30년간 왕성한 작업을 펼쳤으며 4500여 점의 작품을 남겼고 세계 200여 개 갤러리와 박물관에서 전시했다. 한국에 두 번이나 왔었고 그의 작품은 과천 현대미술관에도 걸려 있다. 화려한 색상으로 생동감 있게 오리지널 이바탄의 에너지와 정체성을 표현했던 그는 2004년 고향인 바탄섬으로 돌아와 생을 마감했다. 그의 작품들로 가득 찬 박물관이자 그의 스튜디오였던 펀다시온 파시타 바타네스 네이처 로지는 270도의 전망을 자랑하는 바탄섬 최고의 호텔이며 신혼 여행지로도 손색없는 로맨틱한 곳이다. 방이 8개뿐이어서 예약이 쉽지 않고 2박 이상 머물러야 하는 규정도 있다. 그래도 바탄섬 여행을 사랑하는 이와 가겠다거나 이왕이면 최고의 숙소에 머물러보고 싶은 이들이라면 이 정도의 금액은 투자할 만하다. (1박 약 22만~42만원)
예술가의 감성이 느껴지는 펀다시온 파시타 바타네스 네이처 로지 내부.
예술가의 감성이 느껴지는 펀다시온 파시타 바타네스 네이처 로지 내부.
입에 딱 붙는 이바탄 가정식

이바탄식 바비큐
이바탄식 바비큐
바탄섬의 시내이자 수도인 바스코엔 피자집도 있다. 하지만 기왕이면 이바탄 전통스타일로 식사하는 것이 필수. 저렴한 가격에 푸짐한 식사를 할 수 있는 가정식 식당들은 가성비도 좋지만 맛도 훌륭하다. 코코넛게, 날치, 그리고 펀(fern)이라 불리는 야생초 등 바타네스산 식재료로 요리한 음식들은 가능하다면 놓치지 않는다. 추천하고 싶은 숙소 중 하나인 펜션 이바탄의 레스토랑에선 어마어마한 양을 자랑하는 이바탄 플래터가 유명하다. 꼬치구이, 튀김, 바비큐 그릴 고기, 밥이 한 접시에 담겨 나오는데, 빵나무의 녹색 잎들로 화려하게 장식한 접시와 음식의 조화는 가히 입이 딱 벌어질 정도로 푸짐하고 이국적이다. 밥을 포함해 모든 요리가 테이블 중간에 놓이고 각자 개인 접시에 원하는 만큼 덜어 먹는 것도 왠지 친근하다. 쌀농사를 짓진 않지만 주식은 밥이고 강황을 넣은 노란색 밥도 즐겨 먹는다. 바탄에서 많이 나는 작물인 고구마를 튀겨 꿀을 바른 카모테 큐(Kamote Cue)는 우리네 맛탕과 비슷하다. 사탕수수로 만든 술, 팔렉이나 베리 종류인 아리우스로 제조한 와인, 그리고 텁호 차도 마셔볼 기회가 있다면 시도해보도록 하자.

파시타아바드의 작품
파시타아바드의 작품
바탄엔 화려한 레스토랑이나 해가 지면 느긋하게 술 한 잔 기울일 펍도 없다. 현지 식당들은 하늘과 바다를 배경으로 하고, 바닷바람이 음악이며, 개와 고양이도 더러 음식을 같이 나눈다. 현지인이 운영하고 현지인의 솜씨를 볼 수 있는 이런 식당들엔 바가지도 없고 눈속임도 없다.

어디 자연이 아름다운 곳이 바타네스뿐일까? 하지만 바타네스의 자연이 특별한 것은 훼손되지 않은, 자본이 침범하지 않은 진짜 자연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바타네스를 가장 매력적이게 하는 큰 유산이다. 굽이굽이 끝없이 펼쳐진 초원, 언덕, 언덕 위에 한가로이 풀을 뜯는 소와 염소, 말,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여행지 중 요란하게 유명한 곳도 없는 이곳이 인간에게 평화로움을 준다는 아주 작고도 큰 이유만으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있었다. 바탄섬의 시간이 흐르고 나면 또 다른 두 개의 섬 삽탕과 이바얏섬도 궁금해질 것이다.
파란 바다 위에 얹힌 초록 언덕, '세상의 끝'이라 불리는 天國의 섬… 느릿느릿~ 시간의 사치를 누리다
조은영 작가는…

한 권에 한 지역, 한 도시, 한 마을만 얘기하는 트래블 매거진 MOVE의 발행인이다. 책에서 못다 한 여행지의 깊은 이야기를 ‘여행의 향기’에서 풀어 놓는다.

바탄=글·사진 조은영 여행작가 movemagazine01@gmail.com

여행메모

인천에서 마닐라까지 4시간, 마닐라부터 바탄섬의 바스코공항까지는 오전에 출발하는 국내선 PAL이나 스카이젯트를 타야 한다. 상황에 따라 90분에서 두 시간 정도 걸린다. 바타네스는 필리핀이지만 열대 휴양지가 아니다. 평균기온 26도, 공식적이진 않지만 이곳에도 사계절이 존재한다고 현지인들은 말한다. 평균기온 22도, 저녁엔 10도까지 내려가는 12월부터 2월 사이, 이때를 현지인들은 겨울이라 부른다. 3월부터 5월은 점점 더워지고 6월부턴 습해진다. 8월엔 종종 태풍이 오기도 하지만, 이바탄들은 이를 크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외지인에게 태풍 걱정 없이 여행하기 좋은 달을 굳이 꼽자면 12~5월 사이라 할 수 있다.

1페소는 20.38원(2018년 6월 현재), 바탄섬엔 환전할 수 있는 곳이 없으니 미리 페소로 환전하는 게 좋다. 대부분의 장소에서 카드는 받지 않는다.

아쉽게도 국내 여행사 중엔 바타네스 패키지를 운영하는 곳이 없다. 바타네스 공식사이트에 추천돼 있는 현지 여행사들에 직접 연락하는 것이 편리하다. batanes.gov.ph/who-to-contact-for-tour/에 인증된 여행사들을 참조하는 게 좋다. 투어 프로그램은 batanesirayatravel.com에 잘 나와 있다.

바탄섬의 최고급 숙소는 펀다시온파시타(fundacionpacita.ph)이고 기타 소박하고 깔끔한 숙소로는 트로이스 로지(Troy’s Lodge), 바타네스 시사이드 라운지(Batanes Seaside Lounge) 등이 있다. 아고다 등 예약사이트를 통해 예약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