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적 미술 교과서 수록 그림인 운보 김기창의 ‘가을’(1935년작).
대표적 미술 교과서 수록 그림인 운보 김기창의 ‘가을’(1935년작).
국내 최초 서양화가 고희동부터 미술시장의 ‘대장주’ 김환기, ‘당나귀 작가’ 사석원까지.

서울 인사동 청담동 등 화랑가와 미술관에는 미술 교과서에 나오는 거장의 작품은 물론 유명 생존 작가들의 전시회가 줄을 잇고 있다. 미술시장의 침체 여파로 인해 실험성 강한 젊은 작가보다 작품성을 검증받은 대가와 인기 작가들의 전시회를 기획한 결과다. 정치·사회적 전환기를 거치며 치열한 내부경쟁을 통해 탄탄한 실력을 쌓아온 작가들의 잇따른 전시회는 시장이 조만간 활기를 띨 것이란 ‘전조’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화랑가 유명작가 유치전 치열

고희동·김환기·사석원… 거장들, 미술시장 깨운다
화랑가에는 독특한 장르를 선도한 작가들의 유치 경쟁이 치열하다.

선화랑은 한국 수채화의 대가 정우범 화백(72)을 ‘등판’시켰다. 지난 40년간 우직하게 수채화 장르에 매달린 정 화백의 열정을 집중 조명한다는 취지다. 정 화백은 자신만의 독특한 화법으로 한국 수채화의 경지를 한 단계 끌어올린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오는 19일까지 이어지는 전시에서는 아르쉬라 불리는 수채화용 종이를 물에 적시고, 유화 붓을 짧게 잘라 만든 붓끝에 안료를 바른 뒤 글씨를 군데군데 써 넣은 근작 30여 점을 만날 수 있다.

가나아트센터는 50대 초반에 스타 반열에 오른 사석원 화백(59)을 기용해 ‘희망낙서’전을 오는 18일 시작한다. 세상 구석구석을 조용히 지켜본 사슴 호랑이 토끼 부엉이 등 야생동물을 소재로 젊은 시절의 고뇌를 보여주는 데 전시의 초점을 맞췄다. 동물마다 의미를 정해 놓은 것은 아니지만 청춘 시절 다양한 기억과 추억에 힘을 실어 작품의 톤을 살짝 변주한 게 특징이다.

사진처럼 정교한 극사실주의 화풍의 대표작가 이석주 화백(66)의 개인전은 15일부터 천안 아라리오갤러리에서 열린다. 미국 하이퍼리얼리즘을 흡수해 한국적 극사실의 경지를 이뤄낸 점에 주목했다는 게 아라리오 측 설명이다.

학고재갤러리는 1980년대 민주화 운동과 흐름을 함께한 리얼리스트 강요배 화백(66)에게 공을 들이고 있다. 학고재가 올 상반기 전시 일정에 강 화백을 전면에 내세운 만큼 흥행 여부에 이목이 쏠린다.

현대화랑은 호남 화단을 이끌고 있는 황영성 화백(77)을 초대했고, 리안갤러리 대구점은 한국 추상조각의 개척자 최만린 작가(84), PKM갤러리는 한지 조각으로 명성을 쌓은 전광영 작가(74)의 개인전을 열고 있다.

◆덕수궁관 근대걸작전 눈길

미술관들의 전시 ‘상차림’도 푸짐하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일제강점기와 해방, 6·25 전쟁을 거치며 탄탄한 화력(畵力)을 쌓은 한국미술 거장들의 작품전을 덕수궁관에 마련했다. 지난 2일 개막해 오는 10월14일까지 펼치는 ‘내가 사랑한 미술관-근대의 걸작’전이다. 국내 최초 서양화가 고희동을 비롯해 박수근 이중섭 김환기 유영국 김기창 오지호 등의 수작 90여 점을 걸었다. 국내 미술품 경매 최고가 기록을 세운 김환기의 한국 최초 추상화 ‘론도’, 박수근의 1960년작 ‘할아버지와 손자’, 유영국의 1968년작 ‘산’, 고희동 사후 발견된 ‘자화상’ 등이 관람객을 반긴다. 작품을 한 점씩 지나칠 때마다 한국 근대미술 교과서를 한 장씩 들추는 기분이 들게 한다.

대구미술관은 오는 22일부터 국내 미술시장의 대장주 김환기 회고전을 연다. 미술시장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만큼 유화, 드로잉, 과슈 작품 등 100여 점을 걸어 그의 작품 세계 전체를 보여준다는 취지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이성자), 경기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장욱진·노은님), 서울대미술관(김병종), 금호미술관(정현) 등도 전시 색깔이 도드라져 애호가들을 설레게 한다.

◆컬렉터들 갈증해소… 시장 활력 기대

유명 작가들의 전시회는 미술시장 발전과 함께 미술 애호가들의 갈증을 해소해 주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최근 단색화를 중심으로 한 고가 시장이 보합세를 보이는 사이 상대적으로 소외된 이들 작품이 향후 시장의 새 판을 짤 것이란 분석이다.

노승진 노화랑 대표는 “유명 작가의 작품이 화단에 쏟아져 나오는 것은 국내 미술시장 경기가 바닥을 다지고 있음을 반영한다”고 분석했다.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