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3000년 전부터… 인류 역사는 늘 '비속어 대잔치'
한 젊은 병사가 2차 세계대전에서 살아 돌아왔다. 전쟁 당시 경험을 말해달라는 가족의 부탁에 병사는 이야기 속 끔찍한 욕이 나올 때마다 ‘빈칸’이라는 말로 대신했다. “빈칸 빈칸 빈칸 빈칸. 빈칸 같은 빈칸 빈칸, 빈칸하는 빈칸 같은 빈칸.”

이 농담은 전쟁으로 인해 언어의 세계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일부 학자에 따르면 두 차례 세계대전을 치르는 동안, 그리고 그 이후 사람들은 욕을 과거보다 더 많이 입에 올린다. 전쟁이란 특수한 공포가 욕의 발설 빈도와 수위를 크게 높였다는 것이다.

물론 인류 역사에서 언어의 발전만큼이나 욕이 범람하지 않은 시대는 없었다. 고대 로마시대에도, 신앙의 시대였던 중세에도, 문화가 꽃피운 르네상스시대조차 욕은 흔하게 쓰였다. 멀리사 모어의 《HOLY SHIT(거룩한 욕)》은 단 한 번 쇠퇴한 적이 없는, 불경하고 천박하며 외설적인 ‘욕’이 만들어낸 세계에 대한 책이다.

3000년 전부터 지금까지 욕은 인간의 극단적 감정을 실어나르는 가장 강력한 언어 도구였다. 19세기 프랑스 문학계를 주름잡은 시인 샤를 보들레르가 말년에 뇌졸중으로 쓰러져 말하는 능력을 잃고 병원에 누웠을 때조차 잊지 않고 던진 전설의 문구가 있다. 바로 ‘제기랄(crenom)’이다. ‘악의 꽃’이라는 적나라한 시구를 짓고 당대 문학을 냉철하게 비평했던 보들레르가 욕쟁이로 삶을 마칠 운명이었을까. 욕은 기억조차 사라진 뇌의 한구석에 남아 있는 극단적 감정의 표출창구다.

일반인부터 언어의 마술사로 일컬어지는 당대 문학가까지 욕을 끊임없이 하는 데엔 이유가 있다. 욕이 가진 순기능 때문이다. 욕을 하면 속이 후련해진다. 저자는 욕을 할 때 심리뿐만 아니라 생리적으로도 당혹감, 희열, 충격과 함께 카타르시스를 느낀다고 말한다. 이유가 있다. 언어는 자발적 활동과 합리적 사고를 통제하는 상위뇌(대뇌피질)에서 담당하지만 비속어는 감정과 투쟁, 자율신경계를 관장하는 하위뇌(변연계)에서 다뤄진다는 것도 욕이 특별한 언어적 도구라는 걸 보여준다.

미국 스탠퍼드대에서 중세 르네상스 영문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저자는 역겹고 냄새나고 끈적끈적해 감추려드는 온갖 실체를 말로 내뱉는 데 욕이 가진 힘이 있다고 전한다. 수년 동안 욕에 관해 연구해온 저자는 “내가 던지는 이런 단어로 많은 사람이 여전히 거북해할 수 있다는 게 욕이 가진 힘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영미 비속어보다 더욱 찰지고 노골적인 한국의 욕을 잘 알고 있는 독자들이라면 저자가 우려하는 책 속의 욕이 마냥 불편하게만 느껴지진 않을 것이다.

은정진 기자 silv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