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현대음악 작곡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러시아 현대음악 작곡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러시아 현대음악 작곡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1906~1975)를 대중에게 각인시킨 곡이 있다. 김대승 감독의 2001년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에서 주인공 이병헌과 이은주가 함께 왈츠를 추던 장면에 등장했던 ‘재즈모음곡 2번 중 왈츠2’다. 이 곡은 스탠리 큐브릭이 1999년 선보인 할리우드 영화 ‘아이즈 와이드 샷’과 잭 스나이더 감독의 2016년 영화 ‘배트맨 대 슈퍼맨’에도 나온다. 3박자 왈츠 리듬 속에서 주제 선율을 연주하는 트럼펫의 슬라브풍 애수가 무겁게 반복된다. 곡 중반부터는 ‘왈츠의 아버지’ 요한 슈트라우스류의 화려하고 귀족적인 왈츠 멜로디가 이어진다. 엉덩이가 들썩거리는 왈츠 곡에 20세기 러시아의 시대적 슬픔을 담아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쇼스타코비치 음악으로 러시아 현대사를 반추하다
이 곡은 ‘20세기 베토벤’이라는 별칭이 붙을 정도로 쇼스타코비치를 유명하게 해줬지만 한편으론 아픔이 담긴 곡이기도 하다. 평소 재즈에 관심이 많았던 쇼스타코비치는 1920년대의 화려함과 퇴폐적 경향이 묻어난 ‘재즈모음곡 1번’을 작곡했다. 하지만 재즈를 부르주아 문화로 간주했던 스탈린 정권 치하라는 시대적 상황 때문에 결국 소비에트연방(소련)의 붉은 군대를 연상시키는 ‘재즈모음곡 2번’을 만들게 된다.

쇼스타코비치는 이미 16세 때 큰 규모의 실내악곡을 완성했을 정도로 천재였다. 열아홉 살에는 완성도 높은 첫 교향곡을 작곡했다. 하지만 그에 대한 음악계의 평가는 공산체제의 ‘어용 음악가’와 ‘내부 반항자’로 갈리고 있다. 러시아의 대표적 지휘자 발레리 게르기예프는 1997년 다큐멘터리 ‘스탈린에 저항한 쇼스타코비치’에서 “스탈린의 지속적인 탄압이 그를 더욱 위대한 작곡가로 만들었다”고 말했다. 반면 그의 음악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은 “시대의 희생자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정권 친화적인 음악을 창작한 어용 성향의 작곡가였다”고 주장한다.

한정호 음악평론가는 “소심한 그의 성격 탓에 자신의 정치적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겉으론 공산체제 입맛에 맞는 작곡을 했지만 속으로는 저항했다”며 “평가는 갈리지만 그의 곡 대부분이 암울했던 당시 러시아 시대상을 담아낸 것은 분명하다”고 말했다.

쇼스타코비치에 대한 한국 음악계의 관심은 올해도 이어진다. 지난해 8월 한 달 동안 서울시립교향악단, KBS교향악단, 코리안심포니가 잇따라 쇼스타코비치 작품을 연주한 데 이어 올해는 롯데콘서트홀이 4회에 걸친 쇼스타코비치 시리즈를 마련했다. 다음달 11일 첫 번째 무대에선 KBS교향악단이 피아노 협주곡 1번과 교향곡 11번을 연주한다.

피아니스트 이진상과 트럼페터 성재창이 협연하는 피아노 협주곡 1번은 쇼스타코비치에게 남다른 의미를 지녔다. 그는 이 곡으로 1927년 쇼팽 국제 피아노콩쿠르에서 2위를 차지했다. 하이든의 피아노 소나타는 물론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마지막 악장에 나타나는 론도(주제부 A 사이에 삽입부 B, C를 끼고 되풀이되는 형식), 프로코피예프 혼성곡을 전 음역에 걸쳐 인용했다. 유형종 음악평론가는 “그가 21세 때 작곡한 아주 특이한 곡으로 그의 곡 중 피아노와 트럼펫을 동시에 연주하는 협주곡은 이 곡이 유일하다”며 “피아노 바로 옆에서 서포트하는 트럼펫 덕분에 곡 전체가 날카로우면서도 유머러스해 듣는 재미가 있는 곡”이라고 설명했다.

교향곡 11번은 ‘1905’라는 부제가 말해주듯 러시아 혁명의 시발점이 된 1905년 ‘피의 일요일’ 사건을 4악장에 걸쳐 ‘기승전결’의 흐름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흐루시초프가 ‘평화 공존론’을 제창하고 스탈린을 본격적으로 비판하면서 이른바 ‘해빙기’가 시작된 해인 1956년 작곡에 착수해 1957년 9월에 완성됐다. 이 곡으로 쇼스타코비치는 레닌 훈장까지 받았다.

지휘를 맡은 최희준 지휘자는 “교향곡 11번의 모든 악장은 중간에 쉼 없이 계속 연주된다”며 “통상 전곡 연주에 한 시간 이상이 걸려 지휘자는 물론 오케스트라에도 큰 도전이 되는 곡”이라고 설명했다. 5월11일 공연을 시작으로 쇼스타코비치 시리즈는 6월1일, 11월2일, 12월4일 서울 신천동 롯데콘서트홀에서 이어진다.

은정진 기자 silv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