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훈 로컬랜드 대표
이대훈 로컬랜드 대표
“1996년이었어요. 우루과이라운드(1995년 발효된 다자 간 무역협상으로 농산물시장 개방 등이 포함됨) 타결로 외국산 포도가 본격 수입되면서 포도 값이 엉망이 됐어요. 농사만 지어선 망하겠구나 싶었죠. 관광객을 농장으로 불러들여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포도밭을 뒤엎고 거기다 잔디 심는 일부터 시작했어요. 주변에선 다들 미쳤다고 하더라고요.”

전북 김제에서 포도 농사를 짓는 이대훈 로컬랜드 대표는 국내 체험농장 1세대다. 그가 1996년 문을 연 로컬랜드는 매년 5만여 명의 관광객이 찾는 명소가 됐다. 와이너리(와인 제조장)와 시음장은 물론 전시·판매 공간과 음식점, 카페, 찜질방, 제빵장까지 갖추고 있다.

그가 김제 백구면에서 포도 농사를 짓기 시작한 건 1983년이다. 전북 익산의 이리농림고를 다닐 때를 빼면 고향에만 있었다. 농사 초창기 그의 포도 과수원은 2만㎡에 달했다. 지금은 그 면적이 3분의 1 수준인 6600㎡로 줄었지만 소득은 늘었다.

이 대표를 포함한 직원 5명이 일하는 로컬랜드의 연매출은 5억원에 이른다. 이 농장의 칠감포도는 한 박스(4㎏)에 5만원에 팔린다. 보통 포도보다 2~4배 비싼 가격이다. 그래도 2000상자가량을 시장에 내놓으면 얼마 안 가서 다 팔린다. 칠감포도는 짙은 남색부터 보라색, 붉은색, 청록색까지 맛 색깔 크기 등이 다른 7가지 품종을 한 송이씩 담은 상품이다. 예쁜 색깔 덕분에 선물용으로도 인기다.

고교 졸업 뒤 농사만 지어온 이 대표가 틈새시장을 뚫을 수 있었던 비결은 뭘까. “변하지 않으면 망한다는 절박함”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우루과이라운드 협상이 타결된 뒤 국내 농산물 가격이 급락했다. 수입제한 보호를 받아오던 농민들로선 처음 겪어보는 위기였다.

그는 수입 포도와 가격 경쟁을 펼치는 건 승산이 없다고 봤다. 재배 면적을 넓히고 생산 효율을 높인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틈새시장을 노리는 전략을 세웠다. 체험·가공에 주력한다면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칠레 포도 농가를 직접 방문할 한국 소비자는 많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난해 농촌진흥청이 선정하는 과수 분야 최고농업기술명인으로 뽑힌 이대훈 로컬랜드 대표.
지난해 농촌진흥청이 선정하는 과수 분야 최고농업기술명인으로 뽑힌 이대훈 로컬랜드 대표.
1996년 포도밭 일부(1322㎡)에 잔디를 깔고 큰 평상을 놓은 게 체험농장의 출발이었다. 당시만 해도 사람들이 농장을 찾아가 농산물을 직접 수확하는 체험프로그램은 드물었다. 체험농장 문을 연 첫해 3000여 명이 다녀갔다. 2000년 무렵에는 연 방문자가 1만 명을 돌파했다. 방문객이 증가할 때마다 식당, 카페, 캠프파이어 등 편의시설도 함께 늘렸다.

이 대표는 포도 재배 부문에서 손꼽히는 장인이다. 지난해 농촌진흥청이 선정한 과수 분야 최고농업기술명인으로 뽑혔다. 포도 재배 기술을 공부하기 위해 한 다양한 시도가 결과적으로 농장을 찾는 방문객을 늘리는 효과를 냈다.

“1990년대 후반부터 한국농수산대 현장교수로 일하면서 포도 재배 기술을 고도화하는 데 집중했습니다. 다른 나라의 재배 기술에도 관심을 기울였고요. 포도가 품종마다 모양이나 크기가 다르거든요. 어떤 품종은 포도송이가 1m가 넘고 또 어떤 품종은 포도알이 감만 하기도 해요. 이같이 다양한 포도를 키우다 보니 이걸 잘 꾸며놓으면 볼거리가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렇게 해서 생겨난 게 로컬랜드 안에 자리잡은 포도박물관이다. 이곳에는 세계 30여 개국에서 들여온 120여 종의 포도나무가 자라고 있다. ‘포도와 함께하는 세계여행’이란 주제로 포도나무마다 원산지와 특징을 적었다. 포도나무를 따라 걷다 보면 포도에 얽힌 각 나라의 역사를 알 수 있다. 관광객 사이에선 사진 촬영 명소로 통한다. 다양한 포도를 섞어서 파는 칠감포도 판매 아이디어도 이곳에서 나왔다.

국내 체험농장 중에서 선두권이란 평가를 받지만 이 대표는 “성공까지는 아직 갈 길이 멀다”고 했다. 외국의 유명 체험농장들을 보면 확실한 브랜드 이미지를 구축하기까지 수십 년이 걸렸다는 설명이다.

이 대표는 요즘 로컬랜드에서 생산한 와인을 소비자에게 알리는 일에 집중하고 있다. 포도 가공제품의 최정점은 결국 와인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서다. 1년에 1만5000병가량을 생산해 일반 매장에 내놓는 게 그의 1차 목표다. “외국에 있는 오래된 와이너리는 그 자체로 훌륭한 관광상품이잖아요. 여기 김제 백구면을 미국 캘리포니아의 대표 와이너리인 나파밸리 같은 곳으로 만드는 게 제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김제=FARM 홍선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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