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윤 시인의 새로 쓰는 '섬 택리지'

<15> 다도해 2000개 섬으로 통하는 길목, 목포와 고하도(下)

이순신 장군이 왜적 물리친 교두보… 고하도는 '승리의 역사 저장고'
                                      1897년 10월 개항한 목포항. 항 앞에 보이는 고하도가 파도를 막아준다.

1897년 10월 개항한 목포항. 항 앞에 보이는 고하도가 파도를 막아준다.

목포 원도심은 근대 건축유산의 보고다. 근대 건축물 300여 채가 온전히 남아 있다. 대부분의 도시는 재개발로 원형이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목포는 매립지인 외곽으로 신도심이 형성되면서 원도심은 그대로 방치됐다. 그것이 역으로 도시의 원형과 근대 건축물들을 보존시켰다. 이 나라에 100년 된 근대 도시의 원형이 그대로 남은 곳이 또 있을까? 목포가 유일할 것이다. 게다가 목포 원도심에는 이미 문화재로 지정되거나 등록된 건축물도 허다하다.

일제 식민지 시대의 건물이 남아 있는 구도심

사적 제289호인 구 일본영사관 건물은 현재 근대역사관 본관으로 사용 중인데 유달산 노적봉 바로 아래에 있다. 일제가 호남 지방의 미곡, 면화, 소금 등 식민지 수탈의 총지휘부로 사용했던 건물이다. 붉은 벽돌로 지은 이 르네상스식 건물은 100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견고하고 아름답다. 1900년 건립된 이후 1907년까지 일본 영사관으로 사용되다가 목포부청사, 목포시립도서관, 목포문화원 등을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대리석으로 치장한 벽난로와 당시 사용하던 거울까지 원형 그대로 잘 보존돼 있고 목포의 역사와 식민지 침탈의 사료들이 전시돼 있다. 건물 뒤편에는 암반을 파내 만든 방공호가 참혹한 시대의 역사를 증거하고 있다. 태평양 전쟁 말기 일제가 조선인들을 강제동원해 노예노동으로 만든 것이다.
일본 영사관 건물

일본 영사관 건물

구 일본영사관 인근에는 근대역사관 별관으로 사용 중인 동양척식주식회사 건물도 남아 있다. 동척은 일본이 식민지 조선의 토지와 농산물 등을 수탈하기 위해 만든 착취기관이다. 척식(拓殖)은 ‘식민지 개척’이란 뜻인데 네덜란드나 영국의 동인도 회사와 비슷한 성격이다. 일제는 1908년 경성에 동척 본점을 세우고, 부산·목포·평양·사리원 등 전국 주요 농업지역과 교통요충지에 지점을 설치했는데 전국 9곳의 동척 본·지점 중 현재는 부산과 목포 지점만 건물이 남아 있다. 두 건물 다 수탈의 상징물을 역사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문화재로 등록한 뒤 근대역사관으로 사용 중이다. 목포 지점 건물은 영산포에 있던 동척 지점이 목포로 옮겨오면서 1920년께 건축됐다. 식민지시대의 뼈아픈 역사를 공부할 수 있는 공간이다.
옛 동양척식회사 목포지점

옛 동양척식회사 목포지점

인근에는 또 등록문화재 30호인 심상소학교 강당 건물도 남아 있다. 1929년 건립된 이 건물은 철근 콘크리트 구조인데 일제가 일본인 아동들만을 교육하기 위해 목포에 처음 설립한 소학교의 강당이다. 목포역 인근 오거리에는 등록문화재 340호인 동본원사 목포별원 건물도 있다. 언뜻 보면 마치 일본의 절에 온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지붕 형태가 일본스럽다. 지금은 오거리문화센터로 쓰이는데 본래는 일본 사찰 건물이었다. 세간에는 현존하는 한국의 일본식 사찰은 군산의 동국사가 유일하다고 알려져 있지만 잘못된 정보다. 목포에만 일본식 사찰 건물이 3곳이나 남아 있고 그중 원도심의 정광정혜원과 약사사는 아직도 사찰로 활용되고 있다.
일본인 아동이 다녔던 심상소학교

일본인 아동이 다녔던 심상소학교

일제에 항거한 순국열사의 산실 양동교회

동본원사 건물은 2004년 문화재청이 근대문화유산 등록 예고까지 했지만 목포시가 주차장을 만들 계획을 세우면서 철거 위기에 몰렸었다. 하지만 시민단체의 철거 반대 운동으로 건물은 지켜졌고 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일본에 본부가 있는 동본원사는 구한말 부산에 별원을 설치한 뒤 각 개항장에 별원을 설치했는데, 인천에는 1884년, 목포에는 1898년에 세웠으며 포교 외에 개항장 내 일본인 자녀를 교육하는 소학교와 복지시설도 운영했다. 현재의 석조건물은 1930년대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1957년 목포중앙교회에서 이 건물을 인수해 한동안 교회로 사용했다. 일본 불교사찰의 지붕에 십자가가 걸렸을 당시 풍경을 생각하면 절로 웃음이 나온다. 참으로 독특한 역사와 이야기를 지닌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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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목포시 북항과 고하도 사이를 연결하는 목포대교.

목포에서 또 하나 빼먹지 말고 둘러봐야 할 곳은 등록 문화재 제114호인 양동교회다. 양동교회는 1919년 3월21일 일어난 목포 3·1만세운동의 중심지였다. 이경필 목사를 비롯한 교인들이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양동교회 교인 서상술과 박상봉은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했고 20년 뒤에는 양동교회 박연세 목사가 일제의 신사참배정책에 항거하다 투옥돼 1944년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하기도 했다. 이 건물은 미국 남장로교의 선교사 유진벨이 1911년 건립한 목포 지역 최초의 교회 본당 건물이다. 민간정원인 이훈동정원도 놓치기 아까운 공간이다. 1930년대 일본인이 만든 정원을 조선내화 창립자 고(故) 이훈동 회장이 매입해 가꿔왔다. 2000여 평이나 되는 대형 정원에는 다양한 석탑과 113종 400그루의 나무가 자라고 있는데 한때 목포 신랑·신부들의 웨딩 촬영장소로 유명했다. 매주 토요일 단 2시간만 개방된다. 이훈동 회장이 생전에 수집한 추사, 대원군, 소치, 남농, 이응로 화백 등의 진귀한 작품이 상설 전시되고 있는 성옥미술관도 빼놓을 수 없는 원도심의 명소다. 일제시대 유산인 원도심을 돌아보고 목포대교를 건너면 왜적으로부터 나라를 지켜낸 호국의 성지 고하도(高下島)에 이르게 된다.

군량미 비축지이자 목포의 방파제 고하도

목포가 항구 도시로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앞에서 파도를 막아주는 고하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고하도는 목포의 방파제다. 고하도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이순신 장군으로 인해서다. 1597년 9월16일, 이순신 함대는 명량해전 승리 직후 서둘러 몸을 숨겨야 했다. 아직도 건재한 수백 척의 왜군 함대가 다시 공격해 온다면 막을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잠깐 숨을 돌리고 피신해 있던 이순신 함대는 1597년 10월29일 고하도로 들어와 진을 친다. 섬의 서북쪽이 병풍처럼 솟아 있어 배를 감추기에 적합한 데다 호남평야의 곡식들을 싣고 영산강을 따라 내려오는 운반선들의 통로였기 때문이다. 전쟁도 먹을 것이 있어야 한다. 먹고 살아야 군함도 만들고 무기도 만들고 전투도 할 수 있다. 고하도는 군량미 비축에 최적지였던 것이다. 고하도에는 18세기에 건립된 이충무공 유허비가 하나 있는데 이 비문에 그 내력이 기록돼 있다.
                                                                        천연기념물인 목포 갓바위

천연기념물인 목포 갓바위

“대체로 이 섬은 남쪽에서 서쪽으로 이어지는 바다의 길목에 위치하여 오른편으로 영남에 연하고 왼편으로 한양으로 연결된다. 가깝게는 군사들에게 식량을 공급할 수 있어 승리를 기약함이요.”

고하도는 1598년 2월17일 완도의 고금도로 옮겨갈 때까지 107일간 조선수군의 총사령부였다. 삼도수군통제영의 본영이었다. 이 기간 이순신 장군은 소멸되다시피 한 조선 수군의 재건을 위해 무기와 전함을 만들고 군량미를 비축했다. 장군은 이곳에 남·서 길이 1㎞, 높이 2m, 폭 1m의 석성을 쌓아 적선의 동태를 감시하는 한편 군량미를 모으기 위해 오가는 배들에 1~3석의 식량을 내어 놓고 통행첩을 받아가도록 했는데 불과 열흘 만에 1만 석의 군량미를 모았다. 단기간에 그토록 많은 군량미를 모을 수 있었던 것도 영산강 수로로 이어지는 고하도의 지리적 위치 때문이었다. 현재의 무기상들처럼 과거에도 상인들에게는 전쟁이 돈벌이의 기회일 뿐이었다. 상인들에게 통행세로 받은 곡식이 있으니 전함도 만들고 군사들도 모았다. 고하도 주둔 기간 이순신 장군은 전선 40여 척을 건조하고 군사 2000여 명을 모집해 훈련시켰다. 목포의 섬, 고하도 덕에 조선 수군이 재건될 수 있었던 것이다. 고하도가 호국의 성지인 것은 그 때문이다.
                                                               경상도우회 사람들이 새긴 암각

경상도우회 사람들이 새긴 암각

이순신 장군이 전함 건조했던 성안골

조선시대 나주목에 속했던 고하도는 보화도(寶和島), 비노도(悲露島), 고하도(孤下島) 등 여러 이름으로 불렸는데 유달산 밑에 있는 섬이라 해서 고하도라 부르게 됐다는 설이 있다. 목포에서는 고하도를 흔히 ‘용섬’이라고 부르는데 아마도 먼 바다를 향해 나아가는 형상의 용머리해안 때문일 것이다.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는 보화도(寶花島)란 이름으로 등장한다. 고하도에는 ‘원마을’ ‘아래쪽마을’ ‘섭드러지’ ‘큰덕골’ ‘뒷도랑’ ‘가장골’ 등 작은 자연부락이 있었는데 가장 큰 마을은 선착장 부근의 원마을이다. 이 일대에 이순신 장군의 사당인 ‘모충각’이 있고, 모충각 안에 이충무공유허비가 있다. 모충각 주변 고하도의 큰 산인 뫼봉산 정상에 이순신 장군이 조성한 고하도진성의 흔적이 있다. 모충각을 비롯한 이들 유적이 통칭 ‘고하도 이충무공유적’이다.

유적지 근처 큰덕골은 성안골이라 하는데 이순신 장군이 전함을 건조하던 조선장(造船場)이 있었다. 지금은 간척이 돼 사라지고 없다. 다리가 놓아지기 전까지는 원마을 선착장과 목포항을 오가는 여객선이 있었지만 이제 어선들만 정박해 있다. 고하도 모충각에서는 아직도 통영 충렬사처럼 장군의 탄신일과 순국일에 제를 올린다. 조선시대 내내 고하도는 이순신 장군의 사적지로 존중받았고 고하도 사람들은 구국의 섬이란 자부심이 넘쳤다. 1904년 일제가 고하도를 점유하기 위해 허가를 구했을 때 무안감리(목포시장의 전신)가 “고하도는 조선의 충신 이순신의 사적지이기 때문에 일본인들의 점유를 허락할 수 없다”고 거부 의사를 표하기도 했다 한다. 이순신 장군 함대가 주둔했던 기억은 고하도의 민속놀이인 ‘고하도 강강술래’를 통해 전승되고 있다.

강강술래 강강술래 충무강강 고하술래

임진왜란 칠년동안 강강술래

백전백승 하시고도 강강술래

슬프도다 충무공님 강강술래

고하도에 충무비는 강강술래

남해왜적 쳐부술때 강강술래

고하도서 실어다가 강강술래

우리군사 길렀다네 강강술래



고하도가 다리로 목포와 연결되기 전에는 여객선이나 유람선을 타고 많은 사람이 고하도를 찾았다. 하지만 다리로 이어지면서 뱃길이 끊기자 고하도는 오히려 목포와 단절이 깊어졌다. 고하도가 그저 지나가는 통로가 돼버린 것이다. 목포항과 고하도 간의 뱃길을 복원해야 한다. 목포를 찾는 사람들이 일제의 유산들만 돌아보고 가게 해선 안된다. 왜적에 맞서 싸워 이겼던 승리의 기억도 함께 가져가게 해야 한다. 그 기억의 저장고가 바로 고하도다. 고하도의 역사야말로 목포 역사의 완성이다.

강제윤 시인은

[여행의 향기] 일제 유산이 아직 고스란히… 목포 옛 도심은 '뼈아픈 역사의 거울'

강제윤 시인은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 섬 답사 공동체 인문학습원인 섬학교 교장이다. 《당신에게 섬》 《섬택리지》 《통영은 맛있다》 《섬을 걷다》 《바다의 노스텔지어, 파시》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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