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온도] 어른의 맛
맛이라는 것은 대단히 주관적입니다. 최고의 셰프가 요리한 음식이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맛있을 수 있어도 나는 맛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이름 모를 변두리 식당에서 기대하지 않고 먹은 청국장 맛에 감동할 수도 있습니다. 일본의 유명 번역가이자 수필가인 요네하라 마리(1956~2006)는 음식이 의외로 정치적 성향과도 관련이 있다고 했습니다.

옛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개혁)를 이끌던 고르바초프의 오른팔이던 리가초프는 보수적인 인사의 대명사였습니다. 그는 해외에 가서 회나 조개는커녕 낯선 음식이 나오면 아예 입에도 대지 않았다고 합니다. 중도파에 가까운 고르바초프는 회에는 거부 반응을 보였지만 의외로 샤부샤부나 튀김은 엄청나게 좋아했습니다. 반면 극좌파로 불리던 고르바초프 이후의 소련 지도자 보리스 옐친은 어떤 음식이든 다 즐겨 먹었습니다. 일본인보다 회를 더 즐겨 먹었다고 합니다.

[여행의 온도] 어른의 맛
확실히 음식 취향을 보면 이 사람과 잘 어울릴 수 있는지 어느 정도 짐작이 갑니다. 회를 좋아하는지, 스테이크를 먹을 때 레어(살짝 익힘)를 좋아하는지 아니면 미디엄 레어나 웰던(잘 익힘)을 좋아하는지, 낯선 음식을 잘 먹는지 아닌지…. 음식 성향을 보면 사람이 보입니다. 요네하라가 혈액형보다 음식 취향을 보면 그 사람의 성향을 더 잘 알 수 있다고 한 말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음식은 여행을 이루는 콘텐츠 중 가장 본질적인 것인지도 모릅니다. 오스트리아의 빈은 볼거리가 많은 여행지입니다. 미술을 잘 모르는 필자가 가장 좋아하는 화가인 에곤 실레와 구스타프 클림트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가 소장했던 진귀한 작품을 모은 빈 미술사 박물관을 보면 그야말로 입이 딱 벌어집니다. 마네, 모네, 모딜리아니에서 고야, 고흐까지 교과서에만 봤던 대가들의 작품이 1층부터 3층까지 빼곡하게 전시돼 있습니다. 그 작품을 제대로 돌아보려면 하루종일 봐도 어림없습니다. 빈의 심장이라 불리는 슈테판 성당은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빈은 그리 크지 않은 도시인데도 볼거리가 많아 행복했습니다. 하지만 음식만은 예외였습니다. 오스트리아가 독일어를 쓰고 한때 독일연방에 소속된 나라여서인가요? 한 번도 빈 음식이 맛있다고 느낀 적이 없습니다. 대표 음식인 슈니첼은 우리나라의 돈가스와 비슷합니다. 립과 같은 음식도 있지만 이런 음식들은 대개 너무 짜서 먹을 수 없을 지경입니다. 그나마 슈니첼이 먹을 만하고 종류도 다양합니다. 굽거나 찌거나 심지어 튀기기도 하지만 어떤 종류의 슈니첼을 먹어도 돈가스 같습니다. 음식이 물려버리니 도무지 여행이 흥이 나지 않습니다.

한국 음식점에 가서 든든하게 김치찌개를 먹고 나서야 힘이 났습니다. 여행 기자로 10년 넘게 일했으면 여행하는 나라의 다양한 음식을 먹어야지 그 먼 곳까지 가서 한국음식을 먹느냐고 비웃을 분도 있겠죠. 하지만 맛없는데 굳이 그 나라의 풍물을 이해하려고 억지로 먹기는 싫습니다. 다양한 음식에 도전해보기는 하지만 내 취향에 맞는 음식을 먹을 생각입니다. 아무래도 저는 고르바초프형의 중도 성향이 분명한 것 같습니다.

단 음식은 싫고 회 종류를 좋아합니다. 소고기는 살짝 익혀 먹습니다. 양고기 돼지고기 말고기 등 고기 종류는 대부분 좋아합니다. 전갈, 메뚜기 같은 음식도 잘 먹지만 기니피그나 양서류, 설치류 등의 음식은 대부분 싫어합니다.

간이 진한 음식은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재료 본연의 맛을 제대로 살린 음식을 좋아합니다. 낫토(사진), 청국장, 취두부 등 숙성된 음식 또는 발효음식을 좋아하지만 노르웨이산 청어는 냄새조차 맡기 싫습니다.

내 음식 취향을 고백했지만 사실 그렇게 특별하지는 않습니다. 좀 예민하고 까다로울 뿐입니다. 때로는 음식보다 외적인 부분에 신경쓸 때도 많습니다. 종업원의 태도 및 청결 같은 것도 맛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진지하게 말했지만 그렇게 음식 취향이 까다롭지도 않습니다. 다만 히라마쓰 요코라는 일본의 유명 음식평론가의 말처럼 ‘어른의 맛’을 즐기고 싶은지도 모릅니다. 어른의 맛은 단지 성숙한 맛이나 오래된 음식에서 느끼는 맛이 아닙니다. 삶을 더욱 성숙하게 하는 맛, 사람의 인생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맛인지도 모릅니다.

언제쯤 돼야 진짜 어른의 맛을 이해하고 느끼고 먹게 될까요? 아직 나는 맛에서는 이제 겨우 유치원을 졸업한 것은 아닐까요?

skycb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