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임브라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로기아 레스토랑의 테라스.
코임브라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로기아 레스토랑의 테라스.
코임브라대 시계탑 종소리, 검은 망토를 휘날리며 성큼성큼 걷는 학생들의 발걸음 소리, 요아니나 도서관 책 복원사의 책장 넘기는 소리, 미로 같은 골목 안에 번지는 감미로운 파두 노랫소리. 여기저기 흩어진 다채로운 소리가 모여 코임브라라는 도시를 이룬다. 그 소리에 귀 기울이며 걷다 보면 이방인의 마음에도 젊음의 싱그러움이 스민다. 그저 책 읽고, 노래하고, 사랑하고 싶어진다. 코임브라의 청춘들처럼.

코임브라=글·사진 우지경 여행작가 traveletter@naver.com

포르투갈 지성의 요람, 코임브라대

포르투갈 중부에는 개성이 강한 도시가 많다. 몬데구 강가에 있는 코임브라는 대학 도시 특유의 마력을 발산하는 곳이다. 도시에서 가장 높은 언덕 위에 있는 코임브라대는 2014년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코임브라에 가던 날 가이드 파울루에게 “코임브라대가 포르투갈에서 제일 오래된 대학인 것 알죠? 유럽에서 세 번째로 오래됐을 만큼 유서가 깊어요. 백미는 요아니나 도서관이죠. 18세기에 지은 호화로운 도서관의 극치를 보게 될 거예요”라는 말을 들은 순간의 흥분을 잊을 수 없다. 역사의 숨결이 깃든 캠퍼스를 거닐고, 온통 책, 책, 책, 고서로 가득한 서가에 파묻히는 장면은 상상만 해도 행복했다.
구시가와 몬데구 강이 내려다보이는 코임브라대.
구시가와 몬데구 강이 내려다보이는 코임브라대.
포르투갈 최초의 대학이 처음부터 코임브라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원래는 1290년 리스본에 세워졌다. 1308년 코임브라로 옮겼다가 다시 리스본으로 이전을 반복했다. 1537년 15대 국왕 주앙 3세의 명에 따라 코임브라에 정착했다. 언덕 위에 있던 코임브라 궁전을 대학으로 변신시킨 것이다. 대항해 시대의 포문을 연 포르투갈 황금기, 마누엘 1세의 아들로 태어난 주앙 3세는 코임브라대 이전뿐만 아니라 아시아와 아프리카로 영토를 확장하기도 했다. 이후 코임브라대는 포르투갈 국민 시인 루이스 드 카몽이스, 1949년 노벨의학상 수상자인 신경학자 에가스 모니스 등 문인과 학자를 배출하며 학문을 꽃피웠다.
옛 코임브라 궁전을 개조한 코임브라 구대학 전경.
옛 코임브라 궁전을 개조한 코임브라 구대학 전경.
요아니나 도서관은 1728년 주앙 5세가 건립했다. 여전히 포르투갈이 식민지 확대로 부를 누리던 시절이었다. 그 덕에 도서관에는 탐험가 페르난두 알바레스 카브랄이 브라질에서 대량으로 가져온 금이 아낌없이 쓰였다.

시간이 흐르며 새로운 대학 건물도 점점 늘어났다. 그래서 코임브라대는 구대학과 신대학으로 나뉜다. 신대학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지만, 구대학 관람은 유료다. 입장권을 사서 ‘철의 문(Porta Frrea)’을 통과해야 비로소 요아니나 도서관과 법학대가 있는 캠퍼스가 펼쳐진다.

시계탑이 솟은 ㄷ자형 대학 건물이 파티우 다스 에스콜라 광장을 빙 두르는 모양새다. 광장 가운데는 주앙 3세의 동상이 위풍당당하게 서 있다. 학생들 사이에서 염소로 통하는 시계탑에 오르면 코임브라 구시가를 360도로 조망할 수 있다. 염소라는 별명은 수업이 끝나는 종소리가 울리면 신입생들이 선배들의 괴롭힘을 피해 염소처럼 급히 기숙사로 돌아갔다는 데서 유래했다.

금빛 찬란한 도서관에 박쥐가 산다

요아니나 도서관은 광장의 끝, 대학의 안뜰과 마주하고 서 있다. 도서관 입구에 늘 줄이 늘어서 찾기 쉽다. 보존을 위해 20분 간격으로 20명씩 입장을 제한하는 까닭이다. 아! 안으로 들어선 순간 탄성이 터져 나왔다. 금과 대리석, 정교한 프레스코 천장화로 휘황찬란하게 꾸민 도서관의 화려함에 압도되고 말았다.
① 금과 대리석으로 치장한 코임브라대 도서관 내부.
① 금과 대리석으로 치장한 코임브라대 도서관 내부.
테이블 위에는 주앙 5세가 책을 읽다 하인을 부를 때 쓰던 황금종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법학, 철학, 신학 등 라틴어 고서가 무려 3만 권이 꽂혀 있다는 안내자의 설명을 듣고 나서야 검은 책장을 가득 채운 고서에 눈길이 갔다. 커튼을 드리운 창 너머로 햇살이 스며들자 오래된 책 향기가 더 그윽하게 느껴졌다.

“도서관을 지을 때 벽 두께를 2.2m로 공사해 최상의 온도와 습도를 유지하고 있어요. 책 보호를 위해 사진 촬영도 금지합니다. 단 박쥐에겐 도서관 출입을 허락합니다.”

도서관 지하에서 작업 중인 책 복원사.
도서관 지하에서 작업 중인 책 복원사.
귀를 의심했다. 진짜 도서관에 박쥐가 있냐고 되묻자, 박쥐가 낮에는 서가와 벽 틈에 숨어서 자다가 밤이면 내부를 날아다닌다는 답이 돌아왔다. 박쥐 배설물이 책상에 떨어지지 않게 일일이 천으로 덮고, 청소를 철저히 하는 수고를 감수하며 박쥐를 보호한다는 것이다. 박쥐가 고서를 갉아 먹는 책벌레를 잡아먹는다는 말을 듣고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장미의 이름》을 쓴 소설가 움베르토 에코도 이곳을 다녀간 뒤 고서가 많은 자신의 서재에 박쥐를 키우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다는 말엔 피식 웃음이 났다. 290년 묵은 도서관의 신비로운 책 관리법에 감탄하며 지하로 내려갔다. 지하 1층에는 책을 유지·보수하는 공간이 있고, 지하 2층에는 옛 학생 감옥이 남아 있다. 때마침 장갑을 낀 손으로 조심스럽게 고서를 매만지는 복원사와 마주쳤다. 그의 책장 넘기는 소리마저 감미로운 음악처럼 귓가를 파고들었다.

검은 망토, 코임브라 스타일 교복

③  코임브라대 교복의 상징 검은 망토.
③ 코임브라대 교복의 상징 검은 망토.
도서관 밖으로 나서자 검은 망토를 입은 학생들이 캠퍼스를 활보하고 있었다. 검은 구두를 신고 성큼성큼 걷는 발소리가 경쾌했다. 말로만 듣던 교복 차림이 신기해서 한참 바라봤다. 코임브라대에는 대대로 이어온 교복 전통이 남아 있다. 남자는 검은 재킷에 바지, 여자는 흰 셔츠에 검정 스커트가 교복의 기본이다. 여기에 망토를 둘러야 코임브라 스타일 교복 패션이 완성된다. 매일 입을 필요는 없지만 법대생들은 평소에도 즐겨 입는다. 해리 포터를 쓴 조앤 K 롤링도 코임브라대 유니폼에서 영감을 받아 소설 속 마법의 학교 의상을 창조해냈단다. 그때, 기념사진을 찍으려던 단체관광객 중 한 명이 망토 입은 학생을 쫓아가 말을 거는 모습을 포착했다. 잠시 후 학생은 웃으며 망토를 벗어 주는 게 아닌가. 파울루에게 물으니 망토를 입고 기념사진을 찍으면 행운이 찾아온단다. 학생에게 망토를 빌려달라고 부탁하면 대부분 흔쾌히 내준다고 했다.

망토를 빌리는 대신 학생들처럼 점심을 먹어 보기로 했다. 식당 후보는 ‘칸티나’와 ‘로기아’ 두 곳. 칸티나는 학생식당이다. 저렴한 가격에 한 끼를 해결할 수 있어 관광객에게도 인기다. 캠퍼스 곳곳에 있는데 대부분 점심은 뷔페식이다. 빵, 샐러드, 메인 요리, 감자튀김 등 입맛대로 골라 담은 뒤 계산하면 된다. 국립 마사두 드 카스트루 미술관에 자리한 로기아는 전망과 식사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는 곳이다. 특히 야외 테라스가 구대학 시계탑에 버금가는 전망을 자랑한다. 코임브라 출신 천재 조각가의 이름을 딴 마사두 드 카스트루 미술관은 11세기 교황이 살던 궁전을 개조한 미술관이다.

건물 지하에는 고대 로마 건축 양식 크립토포르티토(Cryptoportico)가 고스란히 남아 있어 로마 시대의 유물과 미술 전시 관람을 동시에 할 수 있다. 무엇보다 대학 한가운데 갓 발굴한 고대 유물처럼 한 시대가 퇴적된 건물이 남아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파두로 사랑을 고백해요!

식사 후엔 학생들이 다니는 길을 따라 언덕을 내려갔다. 망가 정원, 산타크루즈 대성당, 구대성당 등 올라올 때 보지 못한 건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망가 정원은 주앙 3세의 봉긋한 소매를 본떠 지은 건물이 이색적인 정원이다. 로마네스크와 마누엘 양식의 오묘한 조화가 아름다운 산타크루즈 수도원에는 포르투갈을 건국한 아폰수 엔리케 1세도 잠들어 있다. 요새처럼 단단한 대성당은 포르투갈 로마네스크 양식 건축의 표본으로 꼽힌다. 원래는 아랍인들이 지은 요새였는데, 포르투갈을 건국한 아폰수 엔리케 왕이 12세기에 성당으로 재건했다. 꼭대기에는 성벽에 구멍을 뚫어 놓은 총안이 남아 있다. 포르투갈이 국토 회복 운동을 벌이던 레콩키스타 시대에 썼던 흔적이다.
② 3인조 정통 코임브라 파두 공연.
② 3인조 정통 코임브라 파두 공연.
구대성당을 지나자 가파른 내리막 길을 따라 ‘퀘브라 코스타스’ 계단이 이어졌다. 코스타스(costas)는 영어로 등(back), 퀘브라(quebra)는 브레이커(breaker)라는 뜻이다. 새 학기 술을 마시고 계단을 내려오던 신입생이 계단에서 구르면 허리가 부러진다는 의미에서 붙은 이름이다. 아니, 여행자더러 그렇게 험한 계단을 가라고? 하는 의심은 거둬도 좋다. 대낮의 퀘브라 코스타스는 알록달록 파스텔 빛 건물이 빼곡하다. 소소한 풍경을 좋아한다면 골목 안에 둥지를 튼 서점, 카페, 아기자기한 가게들에 반해 한참을 서성이게 되는 곳이다. 나 역시 서점과 기념품 가게를 기웃거리다 어디선가 흘러나오는 파두 선율에 발길을 멈췄다. 굵고 감미로운 남자의 목소리였다. 리스본의 알파마 골목에서 듣던 애절한 여인의 노래와는 확연히 달랐다. 그 소리는 계단 중간 파두 아우 센트루에서 흘러나왔다. 매일 저녁 정통 코임브라 파두 공연을 선보이는 파두 하우스였다. 얼른 들어가 보자는 내게 파울루가 말했다.

“리스보아(포르투갈로 리스본, 현지인들은 꼭 리스보아라고 말한다.) 파두가 애환을 노래한다면 코임브라 파두는 기쁨을 노래해요. 코임브라 파두는 남자들만 부를 수 있어요. 코임브라 대학생이 고백할 때 여학생의 기숙사 창문 아래서 부르던 세레나데가 전승돼 코임브라 파두가 됐거든요. 지금도 코임브라 대학생들은 보컬 한 명, 기타 두 명 등 세 명이 한 조가 돼 부드럽게 사랑 노래를 부른답니다. 파두를 들은 여학생이 방의 불을 세 번 깜빡이면 승낙의 의미가 되죠.”

파울루의 이야기를 듣고 나자 3인조 가수의 공연이 포트 와인보다 더 달콤하게 느껴졌다. 그 선율이 어찌나 감미로운지, 초저녁부터 파두에 흠뻑 취하고 말았다. 이대로 퀘브라 코스타스 계단을 내려가면 허리가 부러질 게 분명했다. 매일 밤 코임브라의 파두 공연을 들을 수 있다면 다쳐서 이 도시에 눌러앉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코임브라=글·사진 우지경 작가

traveletter@naver.com

▶▶여행 정보

포르투갈 수도 리스본에서 코임브라까지 기차나 고속버스로 갈 수 있다. 리스보아 산타 아폴로니아역이나 오리엔테역에서 기차로 코임브라 A역까지 1시간50분~2시간10분 걸린다. 코임브라 A역에서 구시가까지는 도보 5분 거리. 세테 리우(Sete Rio) 터미널에서 레데(Rede) 버스를 타면 코임브라 버스터미널에 2시간30분 만에 도착한다. 코임브라 버스터미널에서 구시가까지 도보로 약 15분 거리다. 코임브라는 몬데구 강을 가운데 두고 구시가와 신시가로 나뉜다. 코임브라대를 비롯한 명소는 구시가에 집중돼 있어 걸어서도 둘러볼 수 있다. 단 굽이굽이 언덕길이 많다. 아줄 라인이라는 미니버스나 언덕을 오르내리는 엘레바도르를 이용하면 한결 수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