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만에 돌아온 국내 첫 양봉 교재 '양봉요지'

독일 신부가 쓴 국내 최초의 양봉 교재로 알려진 ‘양봉요지(養蜂要誌)’ 유일본이 출간 100년 만에 독일에서 국내로 돌아왔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과 성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칠곡군은 지난 27일 독일 뷔르츠부르크 인근 뮌스터슈바르자흐수도원에서 반환식을 열고 영구대여 형식으로 ’양봉요지‘를 돌려받았다고 29일 밝혔다. 반환식에는 왜관수도원장인 박현동 아빠스와 지건길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이사장, 백선기 칠곡군수, 뮌스터슈바르자흐수도원의 미카엘 리펜 아빠스와 수도자 등이 참석했다.
양봉요지는 독일인 카니시우스 퀴겔겐 신부(한국명 구걸근, 1884∼1964)가 국내 최초 남자수도원인 서울 백동(지금의 혜화동) 베네딕도수도원에서 서양의 양봉기술을 보급하기 위해 1918년 한글로 편찬한 책이다. 등사본으로 150권이 발행된 이 책은 영인본은 있으나 원본은 국내에서는 현재까지 확인되지 않고 있으며, 출간 직후 독일의 수도원으로 보낸 몇 권 중 한 권이 뮌스터슈바르자흐 수도원에서 확인됐다.
양봉요지를 발견한 사람은 왜관수도원에 선교사로 파견된 바르톨로메오 헨네켄 신부다. 그는 2014년 휴가 때 독일의 여러 수도원을 돌며 수소문하다 자신의 모원(母院)인 뮌스터슈바르자흐 수도원 도서관에서 발견했다. 이후 왜관수도원과 뮌스터슈바르자흐 수도원이 반환을 위한 논의를 시작해 출간 100년이 되는 올해 결실을 보게 됐다.
100년 만에 돌아온 국내 첫 양봉 교재 '양봉요지'
양봉요지의 반환은 왜관수도원과 국외소재문화재단, 칠곡군의 협업이 이룬 성과라는 점에서 더욱 주목된다. 왜관수도원은 이미 2005년 독일 상트오틸리엔수도원 소장 ’겸재정선화첩‘을 영구대여 형식으로 반환받는 과정에서 재단과 협력했던 경험이 있다. 이에 따라 적절한 반환 방식과 반환 이후의 학술 연구, 보존 방식, 영인본 제작 등에 관한 실무 작업을 재단이 적극 지원했다.
왜관수도원이 있는 칠곡군도 힘을 보탰다. 칠곡군은 국내 유일의 양봉특구이자 아카시아 나무 최대 군락지가 있는 곳으로, 매년 양봉 관련 축제를 열고 있다. 양봉요지의 존재가 알려지자 백선기 군수는 칠곡군 농업기술센터를 통해 양봉요지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현대어로 해제본을 제작했고, 그 중요성을 널리 알려왔다. 양봉요지를 오는 3월 칠곡군이 개관하는 꿀벌나라테마공원에서 일반에 처음으로 전시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 관계자는 "2005년 '겸재정선화첩'이 베네딕도회의 한국 선교 100주년을 기념해 영구대여 형식으로 돌아왔고, 이번에는 양봉요지가 반환됐다"며 "왜관수도원과 지자체, 재단이 협업을 통해 책을 환수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말했다.
100년 만에 돌아온 국내 첫 양봉 교재 '양봉요지'
☞’양봉요지‘ 쓴 구걸근 신부는=1909년 사제로 서품된 이후 1911년 서울 백동(현재의 혜화동)에 있던 성베네딕도수도회에 선교사로 파견됐다. 그뒤 만주 옌지의 성십자가수도원과 팔도구·육도포·훈춘성당 주임신부로 일했다. 만주에서 선교사로 일한 지역마다 수십 개의 학교를 설립했다. 1946년 중국 공산당에 의해 옌지의 성십자가수도원이 폐쇄된 뒤 수용소에 감금돼 있다 1951년 독일 슈바이클베르크수도원으로 귀환했다. 한국전쟁 중이던 1953년 12월부터 1955년 말까지 부산의 독일적십자병원에서 수석통역사로 봉사하다 이듬해 본국으로 돌아갔다.
양봉요지 뿐만 아니라 독일인 선교사의 한문 공부를 위해 1915년 ’要漢德解(요한덕해)‘라는 독일어·한자 사전도 저술했다. 1925년 한국을 방문해 방대한 영상기록을 남긴 노르베르트 베버 아빠스가 남긴 무성영화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 나오는 독일인 선교사 가운데 한국민들과 친근하게 어울리기 위해 장기를 두는 사람이 구걸근 신부로 추정된다.

서화동 문화선임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