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유적처럼 장엄한 여서도 돌담 유물들
고대 유적처럼 장엄한 여서도 돌담 유물들
한국의 섬 중 돌담문화가 가장 완벽하게 보존돼 있는 곳은 완도군 여서도다. 여서도는 완도와 제주 사이 큰 바다에 바람 막아줄 무인도 하나 없이 홀로 우뚝 솟아있는 섬이라 돌담이 아니면 밭작물도 자라지 못한다. 여서도는 집뿐만 아니라 텃밭과 외양간까지도 돌담이 있고 각각의 돌담은 모두 하나로 연결돼 있다. 평지가 없는 섬이니 집들은 모두 산비탈에 들어앉아야 했다. 무방비로 들이치는 비바람을 막기 위해 축대를 쌓고 터를 닦아 최대한 높이, 지붕보다 높이 담을 올렸다. 2m는 기본이고 3m가 넘는 돌담도 여럿이다. 외부에서 보면 여서도의 돌담은 마치 하나의 거대한 성곽처럼 경이롭다. 오래 전 필자가 한국의 ‘이스터 섬’이라 명명했던 것은 이 때문이다. 오랜 세월 은둔해 있던 여서도가 이제 조금씩 수면으로 떠오르고 있다. 최근 전라남도의 ‘가고 싶은 섬’으로 선정되고부터다.

300년 역사의 돌담이 원형대로 보존

[여행의 향기] 거친 바람에 당당히 맞서 성곽처럼 우뚝 솟은 돌담… 오랜 은둔에서 벗어나다
“할매 할매 이웃집 할매/딸 있으면 날 좀 주오/딸이사가 있네마는/나이가 작아서 주겠는가/할매 할매 그 말씀 마오/고추는 작아도 맵기만 하고/참새는 작아도 알만 까고/이구십팔 열야달인데/나 적단 웬말이오/딸있걸랑 나를 주오.”(여서도 딸타령)

여서도로 가는 뱃길은 멀고 불편하다. 완도에서 하루 한번뿐인 여객선으로 세 시간을 가야만 도달할 수 있다. 총 연장 2㎞, 300년 역사의 돌담이 원형대로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멀고 불편한 뱃길도 한몫했다. 그런데 이 여서도 돌담이 근래에 위기에 처한 적이 있다. 필자는 오래 전부터 여서도 돌담의 가치에 주목하고 있었는데 도로공사로 인해 돌담 일부가 파괴될 예정이라는 소식을 접했다. 그래서 필자가 몸담고 있는 섬연구소에서 여서도 돌담 지키기 운동을 시작했고 전라남도와 협력해 여서도 주민들의 동의를 이끌어내 돌담은 원형대로 보존됐다.
신비로운 여서도 돌담길
신비로운 여서도 돌담길
불편함을 감수하고라도 돌담을 지키기로 마을 총회에서 결의한 여서도 주민들의 결정은 값지고 값지다. 여서도 돌담 보존에는 당시 전남지사로 재직 중이던 이낙연 국무총리도 크게 기여했다. 필자가 여서도 돌담을 지킬 수 있도록 도움을 요청하자 선뜻 도로공사를 중단시키고, 주민을 설득할 기회를 줬다. 감사한 일이다. 이제 여서도는 도로공사를 포기하고 돌담을 지킨 덕분에 전라남도의 ‘가고 싶은 섬’으로 지정돼 더 큰 혜택을 받게 됐다. 여서도 돌담은 세계적으로도 희귀한 섬의 돌담문명이다. 보존 상태도 완벽하다. 이 지면을 빌려 문화재청에서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추진을 검토해 줄 것을 제안한다.
집 마당에 남아있는 성혈 바위
집 마당에 남아있는 성혈 바위
여서도항에 들어서면 가이똥산, 오이똥산이란 똥똥하고 재미난 이름의 산들이 관문처럼 섬을 지키고 서 있다. 섬에 하나뿐인 마을은 주산인 여호산(352m) 비탈에 자리 잡고 있다. 여서도는 전체가 하나의 산이다. 그래서 마을의 집들은 가파른 산비탈에 계단식으로 들어서 있다. 과거 인구가 많을 때는 여호산의 팔부 능선까지도 계단식 밭이었다. 오이똥산, 가이똥산은 꼭대기까지도 밭이었다. 식량을 얻기 위해 섬사람들이 얼마나 필사적으로 농토를 개간했는지 계단식 밭들이 증명한다.
여서도는 돌담뿐만 아니라 돌집도 많다
여서도는 돌담뿐만 아니라 돌집도 많다
돌밭 활용하기 위해 구들장 논 만들어

여서도는 물이 풍부해 논도 제법 됐다. 대부분 등대 너머 노루목의 계단식 다랑논이었다. 여서도에도 청산도처럼 구들장 논도 남아 있다. 비탈진 땅의 대부분에는 다랑논을 만들었는데 어째서 일부 땅에만 구들장 논을 조성한 것일까. 흔히 구들장 논은 통수로에 주목해 “쌀 한 톨을 생산하기 위해 물 한 방울까지 아껴 쓴 농민들의 지혜가 깃든 농업 문화의 정수”라고 알려져 있다. 물을 재활용하기 위해 구들장 논을 만들었다는 논리다. 하지만 이는 정확한 설명이 아니다. 그렇다면 여서도나 청산도의 그 많은 다랑논은 물을 아끼거나 재활용하지 않았단 말인가? 다랑논이든 구들장 논이든 평지의 논이든 천수답은 대체로 물을 아끼고 재활용하는 구조로 조성됐다. 그렇다면 구들장 논을 만든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돌밭 활용이다. 돌무더기 땅까지도 버려두지 않기 위해서 구들장 논을 만든 것이다. 비탈이더라도 흙으로 이뤄진 땅은 다랑논으로 만들어 사용했다. 그런데 섬에서는 그런 다랑논마저 부족하니 돌밭까지도 구들장 논으로 만든 것이다. 구들장 논은 돌밭에 물이 새지 않게 구들장 같은 평평하고 넓은 돌들을 깔고 그 위에 방수 처리를 한 뒤 흙을 채워 논을 만든 것이다. 하층부에는 통수로를 만들어 물을 재활용했다. 이것이 구들장 논의 진실이다.

제주 오가는 선박의 중간 기착지

여서도는 2.51㎢의 땅에 40가구 60여 명이 거주하고 있다. 한창 때는 300가구 2000명까지 살기도 했다. 과거 여서도는 제주를 오가는 선박들의 중간 기착지였다. 제주 어선들도 많이 들락거렸다. 테우(떼배)를 타고 건너와 자리돔을 잡아가는 제주 어부들도 있었다. 여서도 바다는 옛날부터 황금어장이었다. 여서도 사람들이 지닌 동력선만 50여 척이 넘었던 적도 있다. 인근 청산도에 고등어와 삼치 파시가 섰던 것도 여서도 어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여서도 어부들은 고등어나 갈치를 ‘염장’해서 경남 통영과 삼천포까지 팔러 다니기도 했다. 고등어, 삼치 파시는 1970년대까지 지속되다가 남획으로 인한 어자원 고갈로 지금은 사라진 문화가 됐다. 하지만 지금도 가을, 겨울에는 삼치 잡이가 제법 활발하다. 여서도 일대가 삼치 산란장인 까닭이다.
여서도 해안에서 갓 잡아 올린 삼치
여서도 해안에서 갓 잡아 올린 삼치
여서도에는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다수 남아 있다. 패총과 고인돌, 사람의 손으로 파낸 것이 분명한 성혈 바위 등이 마을의 집들 마당에 그대로 보존돼 있다. 선사시대부터 근대까지 이어진 다산 신앙의 유물인 성혈 유적은 무척 흥미롭다. 여서도에서는 아직도 당제를 모시고 있다. 늘 바다는 외경의 대상이니 과학 문명의 시대라 해서 초자연의 힘을 도외시할 수 없다. 전능한 신에게 기대고 싶은 마음이 당제를 이어온 원동력이었을 것이다. 여서도 당은 세 곳이다. 산 중턱에 상당인 할아버지 당이 있고 마을 쪽 당숲에 하당인 할머니 당이 있다. 또 해변에는 고석바위라 부르는 갯당도 존재한다. 아랫당에 모셔진 신위는 여서도에 살았던 정씨 할머니다. 정씨 할머니가 밭일을 하다 우연히 절간의 추녀 끝에 매다는 작은 종인 풍경을 주웠다. 그 풍경을 신체로 모시다 나중에 정씨 할머니까지 당할머니로 모시게 됐다고 전한다. 정씨 할머니는 풍어의 신이기도 하다. 당제는 섣달그믐부터 정월 초하루까지 지내는 본 당제와 음력 7월1일에 행해지는 두 번째 당제가 있었는데 지금은 정월에 한 번만 지낸다.
여서도는 맑은 날이면 바다 건너 제주도 한라산이 보인다
여서도는 맑은 날이면 바다 건너 제주도 한라산이 보인다
여호산에서 조망하는 다도해 장관

여서도의 주산인 여호산은 잘 보존된 숲이 비할 데 없이 아름답다. 산정에서는 완도, 청산도, 보길도, 소안도 등의 섬들이 연출하는 다도해 풍경이 장관이다. 맑은 날이면 한라산까지 뚜렷이 보인다. 제주도 조천까지 거리가 40㎞에 불과하니 왜 아니겠는가. 여호산 마루에는 해양사의 중요한 유적 하나가 있다. 요망대(瞭望臺)다. 돌담으로 쌓아 만든 요망대는 군사시설이다. 적의 동태를 살피는 감시초소. 여서도 요망대는 대원군 시절 이양선을 감시하기 위해 세워졌다. 둘레 20m, 높이 1.5m 정도인 요망대 바닥에는 구들장이 있는데 추운 겨울 요망대를 지키던 봉군들이 추위를 이기기 위해 깔아놓은 것이다. 근처에는 봉군들이 숙식하던 집터도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섬 주민들이 봉군으로 차출돼 요망대에서 근무했다. 요망대를 지나 하산 길에 있는 윗당산은 제법 규모가 크다. 돌담 안의 당숲 거목들도 신령스럽다. 여호산 등반은 겨울이 좋다. 여름에는 조심해야 한다. 뱀이 지천이다. 특히 비오고 난 뒤에는 몸을 말리려고 나온 뱀이 등산로에 쫙 깔려있다. 웬만한 강심장이 아니면 이때는 등반을 삼가는 것이 옳다. 돌담 또한 담쟁이가 가리지 않는 겨울부터 초봄에 가야 진면목을 볼 수 있다.

여서도 민박집 해물밥상
여서도 민박집 해물밥상
여서도는 돌담도 숲도 비할 데 없이 잘 보존된 보물섬이다. 그럼에도 아쉬운 것은 여서도항 입구의 물양장이다. 지나치게 많은 시멘트로 도배를 해서 생경하기 이를 데 없다. 방파제를 조성하는 과정에서 마을 앞 갯돌 밭도 완전히 소멸됐고 섬사람들과 수천 년을 함께한 바위들도 대부분 파괴됐다. 수많은 이야기가 깃든 삼형제바위, 코찢어진바위, 까마귀바위 등은 사라져 버렸고 진도팍이란 이름의 긴 바위만이 기념물처럼 홀로 남아 있다. 1959년에 한반도를 강타해 사상 최대 피해를 입힌 태풍 사라 때 여서도 주민들도 많은 피해를 봤다. 해변에 있던 집 16가구가 완파되거나 파손되고 노루목 해안의 많은 논도 파도에 멸실되고 말았다. 그러니 파도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방파제 공사는 필연적이었다. 그렇더라도 공사를 쉽게 하려고 해변 경관을 무자비하게 파괴해버린 것은 잘못이다. 섬개발의 반면교사로 삼아야 마땅하다.

강제윤 시인은…

[여행의 향기] 거친 바람에 당당히 맞서 성곽처럼 우뚝 솟은 돌담… 오랜 은둔에서 벗어나다
강제윤 시인은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 섬 답사 공동체 인문학습원인 섬학교 교장이다. 당신에게 섬》 《섬택리지》 《통영은 맛있다》 《섬을 걷다》 《바다의 노스텔지어, 파시》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