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운을 가져다 준다는 청동 멧돼지상이 있는 기타노 뮤지엄.
행운을 가져다 준다는 청동 멧돼지상이 있는 기타노 뮤지엄.
고베는 오사카만에 있는 항구 도시다. 고베는 에도시대 말기까지는 작은 어촌이었지만 다른 지역보다 개항을 일찍 선택했다. 1868년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눈부시게 발전했다. 이 때문에 푸딩 와인 커피 양과자 같은 외국인이 즐기는 것들이 발달했다. 고베는 아픔을 간직한 도시기도 하다. 1995년 1월17일 진도 7.2가 넘는 대지진이 고베를 강타했다. 대지진은 고즈넉하던 고베의 풍경을 완전히 바꿔버렸다. 오래된 목조가옥이 촘촘하던 고베는 지진이 잦아들 무렵 제대로 된 건물이 없을 정도로 무너져버렸다. 어린 시절을 고베에서 보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대지진 이후 고베를 ‘빈터에 짙푸른 여름풀이 무성하게 자라고, 그것은 친밀한 사람의 흰 피부에 남겨진 외과 수술 자국을 연상시킨다’고 상처 입은 도시의 아픔을 이야기했다.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고 바다를 품은 고베의 멋과 맛을 음미하면서 도시를 천천히 걸어보는 것은 어떨까.

개항기 느낌이 물씬 기타노이진칸

고베 여행의 시작지는 산노미야 역이다. 간사이공항의 리무진 버스도 산노미야 버스터미널에 서고 교토나 다른 지역을 갈 때도 대개 산노미야역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스타벅스 기타노이진칸점.
스타벅스 기타노이진칸점.
고베 산노미야 역에서 10분 정도 거리에 있는 스타벅스 기타노이진칸점은 독특한 이력을 지닌 건물이다. 1907년 지어진 건물이니 110년의 역사를 지녔다. 유형문화재로 등재될 만큼 유서 깊은 건물이지만 1995년 한신대지진으로 훼손되면서 철거될 위기에 처했다. 고베시는 건물을 해체한 뒤 건물자재를 보관했다. 이후 민간 사업가가 기존 자재로 고풍스럽게 건물을 올렸다. 전통과 현대의 느낌이 오롯이 살아 있는 이 건물은 고베의 명물이 됐다. 이 건물이 스타벅스 커피숍이 된 것도 이색적이다. 한국은 전통 건축물에 스타벅스를 내주는 경우가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스타벅스에서 10분 정도 걸어서 올라가면 개화기 일본 풍경을 볼 수 있는 독특한 건축물들을 만날 수 있다. 고베 개항 이후 들어온 외국인들이 살던 건물이다. 골목을 따라 덴마크관을 비롯해 빈오스트리아의 집, 향기의 집, 외국인 구락부 등이 줄지어 늘어서 있다. 기타노이진칸이 들어선 건물은 콜로니엄 양식으로 지어졌다고 한다. 콜로니엄 양식은 베란다가 있고 외곽은 페인트로 칠했으며 굴뚝이 있다. 빛바랜 영화에 나오는 서양식 건물의 전형 같은 느낌이다. 통합 입장권을 끊어야 싸게 건물들을 둘러볼 수 있다. 아홉 곳을 모두 돌아보는 데는 3500엔(약 3만5000원) 정도 한다.

기타노이진칸 중 가장 이색적인 건물은 바늘집이다. 외벽이 마치 바늘 모양의 슬레이트석으로 장식돼 붙은 이름이다. 미술관도 같이 운영하는데 집에는 고색창연한 골동품 가구가 전시돼 있다. 정원의 청동 멧돼지상 코는 반드시 만지고 가라고 한다. 행운을 준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지만 말이다. 언덕에 있는 이진칸은 중국 영사관이 있던 곳으로 명나라에서 청나라 사이의 미술품과 가구가 배치돼 있다.

철인 28호와 화려한 모토마치 거리

아카마쓰파크의 철인28호 조형물
아카마쓰파크의 철인28호 조형물
세계적인 만화가 요코야마 미쓰테루의 철인 28호가 세워진 것은 한신대지진 때문이다. 모든 것이 처참하게 무너지면서 고베 신나가타를 재건하기 위해 세워진 조형물이다. 철인 28호는 높이가 18m에 달할 정도로 엄청나게 크다. 이 조형물이 어린이를 비롯해 시민에게 인기를 얻었다.

고베의 또 다른 명물은 철인 28호에서 10분도 안 걸리는 거리에 있는 삼국지갤러리와 삼국지가든이다. 삼국지를 테마로 조성한 삼국지가든은 삼국지 마니아들이 가장 좋아하는 공간이다. 삼국지 이야기를 150개 장면 2000여 개 조각물로 표현한 거대한 디오로마가 이채롭다. 삼국 시절의 의상과 소품도 전시돼 있다. 맞은편 삼국지가든에서는 조자룡의 창이나 장비의 장팔사모 같은 무기를 직접 체험하고 옷도 입어 볼 수 있다. 고베의 또 하나의 명물은 루미나리에다. 일종의 빛의 축제인데 대개 12월에 열린다. 루미나리에는 고베대지진 희생자의 넋을 기리고 도시의 재건을 기원하는 의미를 담았다고 한다.
루미나리에 축제 야경.
루미나리에 축제 야경.
고베에서 꼭 들러봐야 할 곳은 대표적인 상점가인 모토마치다. 이곳은 에도시대 교통의 요지였으며 길을 따라 마을이 생겨났다. 1868년 개항 후 크게 발전했고, 오사카와 연결되는 철도가 개통되면서 더 번화한 거리가 됐다.
상점들로 가득한 모토마치 거리.
상점들로 가득한 모토마치 거리.
모토마치 1번가 부근에 외국인 거류지가 생기면서 고베에서 첫손을 꼽는 서양풍 상점가로 유명해졌다. 늘어선 상가들은 활기차고 외국인 관광객으로 넘쳐난다. 모토마치는 전통식 상점과 고급 상점이 많으며 다양한 쇼핑을 즐길 수 있다.

1초메와 2초메 사이에 있는 난킨마치는 일본에 있는 차이나타운 중 네 번째로 큰 곳이다. 한국인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수입 중화요리 재료점뿐만 아니라 중국음식을 파는 노점이 모여 있다. 그중 로쇼키의 찐빵은 특히 맛있어서 길게 줄을 서 있는 모습을 항상 볼 수 있다. 이 집은 1915년부터 영업을 시작한 부타만(돼지고기 찐빵)의 원조다. 모토마치는 고베의 명물이기도 한 가와라센베점과 일본에서 처음으로 커피를 판 찻집인 자호호코도 등 유서 깊은 상점들을 만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덴마크 치즈케이크를 맛볼 수 있는 간논야나 1949년부터 영업한 모토마치 케이크 등도 빼놓을 수 없는 맛집이다.

4초메 쪽에는 고서와 골동품을 파는 상점이 많다. 모토마치 역의 고가 밑에 길게 이어진 상점에서는 수수하면서 서민적인 물건을 구경할 수 있고 게임, 애니메이션 제품도 볼 수 있다.

눈부신 야경 하버랜드와 포트타워

고베는 밤이 되면 더 아름다워진다. 순위를 좋아하는 일본인이 말하는 일본의 3대 야경 중 하나가 하버랜드다. 바다를 따라 아름다운 불빛이 점점이 수놓인 풍경은 한번 보면 절대 잊을 수 없다. 원래 하버랜드는 창고건물만 가득하던 다소 을씨년스러운 곳이었다. 이곳에 쇼핑몰 모자이크, 대관람차 등 화려한 건축물이 들어서면서 풍경이 바뀌었다. 어둠이 내리면 바다에 그 모습이 비쳐 밤바다는 반짝이는 물결로 일렁인다. 바다를 마주하며 세워진 모자이크는 레스토랑, 의류점, 잡화점, 영화관 등 다양한 상점이 늘어서 있다.
고베의 랜드마크인 하버랜드 포트타워.
고베의 랜드마크인 하버랜드 포트타워.
붉은 벽돌창고가 식당가로 바뀐 ‘렌가소코 레스토랑가’에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을 비롯해 서양음식점이 즐비하다. ‘하버 워크’는 고베 항의 옛 신호소와 도개교 사이에 조성된 산책로다. 산책로 끝의 신호소는 저녁 무렵에 아름답게 빛난다. 바다 건너편을 바라보면 포트타워와 고베해양박물관의 불빛이 반짝인다. 1963년 세워진 고베 포트타워도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고베의 랜드마크로 자리잡은 이곳은 108m 높이의 모래시계 모양 붉은색 철골 구조물이다. 세계 최초의 파이프 구조 건물로 독특한 디자인이 눈길을 끈다. 고베 포트타워는 ‘철탑의 미녀’로 불리며 수차례 일본 건축학회 작품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밤에 불을 밝힌 모습이 장관이다. 전망대에 올라 고베시내를 내려다봐도 좋고, 맞은편 하버랜드에서 불켜진 포트타워를 바라보는 것도 좋다

학처럼 우아한 히메지성의 자태

고베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 히메지 성이다. 고베여행에서 히메지성을 보지 않으면 아무것도 보지 않은 것과 같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17세기 이전 일본 건축물은 대개 목조건물이어서 화재로 소실된 것이 많지만 히메지 성은 원형 그대로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건축물이다. 17세기 목조 건축물의 걸작으로 평가받는 히메지 성은 특히 벚꽃이 피는 3월께 가면 절경을 볼 수 있다. 히메지 성이 화마에 휩쓸리지 않은 이유는 벽에 새하얀 불연성 석고를 발라 보강했기 때문이다. 성을 바라보면 우아하게 위로 젖혀진 처마가 마치 막 비상하는 흰두루미처럼 보인다 해서 시라사기 성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17세기 건축물의 걸작으로 평가받는 고베 히메지성. 일본정부관광국 제공.
17세기 건축물의 걸작으로 평가받는 고베 히메지성. 일본정부관광국 제공.
원래 히메지성은 아카마쓰 가문이 지방 영토를 다스리며 권력을 누리던 영주 다이묘들의 공격을 막기 위해 세운 요새였다. 신기한 것은 전국시대 수없이 전쟁에 휩쓸리고 심지어 2차 세계대전 당시 공습에도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히메지 성은 벽과 해자로 구별돼 있는 동그란 모양의 영지다. 성 안에는 성곽과 탑, 무사들의 숙소 등이 있다.

270년 동안 봉건 영지의 중심이었으며, 성 주변으로 도시가 발달했다. 막부시대 초기에 건설된 수준 높은 보호 방어 장치를 갖춘 83개 건물에 둘러싸여 있다. 막부시대가 끝나고 1868년 메이지유신이 일어나면서 군사 기지로 사용됐다.

히메지 성은 영화와 드라마 배경지로도 각광받는 장소다. 히메지 성을 배경으로 한 영화는 수십 편이나 되지만 우리에게 잘 알려진 영화로는 일본 영화의 거장인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작품 ‘란’과 미국 에드워드 즈윅 감독의 작품 ‘라스트 사무라이’를 꼽을 수 있다. ‘란’은 중세 봉건시대 일본을 지배하던, 의도적으로 미쳐 가는 왕과 세 아들의 증오와 용서를 담은 작품이다. 일본판 오셀로를 연상케 하는 이 작품은 히메지 성을 배경으로 제작한 대표적인 영화다. ‘라스트 사무라이’는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배우 톰 크루즈가 주연한 영화로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었다. 히메지 성 부근에 있는 관광 안내소에서 영화 내용과 주요 촬영 장소를 상세히 알려 준다.

여행정보 마블링이 일품인 고베규

[여행의 향기] 고즈넉한 전통과 현대가 공존… '베스트 여행지' 고베
고베의 명물인 고베규는 일본을 넘어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다. 육질이 부드럽고 촘촘한 마블링이 있는 고베규를 얻기 위해 일본인들은 엄청난 노력을 기울인다. 소에게 맥주를 먹이고 음악을 들려주기도 한다. 심지어 마사지까지 해준다. 고베규는 무엇보다 마블링이 일품이다. 마치 눈이 내린 듯한 마블링이 고기에 박혀 있다.

마블링이 소고기의 맛을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라고 하지만 고베규는 살살 녹는다는 말이 실감 날 정도로 맛있다. 맛이 좋은 만큼 가격도 비싸다. 철판구이집인 스테이크랜드 같은 곳은 점심에는 2980엔 정도에 런치세트를 내놓기도 하지만 보통 5000엔이 넘는다. 1963년 문을 연 토어로드 스테이크 아오야마 같은 곳은 특선코스의 경우 8900엔이 가장 싸다.

고베=글·사진 이솔 여행작가 leesoltour@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