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2월4일까지 서울 동숭아트센터에서 공연하는 뮤지컬 ‘팬레터’.
내년 2월4일까지 서울 동숭아트센터에서 공연하는 뮤지컬 ‘팬레터’.
눈이 휘둥그레지게 하는 무대 변환은 없었다. 조명을 화려하게 사용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잘 짜인 스토리와 극에 잘 어울리는 넘버(뮤지컬에 삽입된 노래)’만으로 135분 동안 관객을 몰입시켰다. 잔기교를 부리기보다 기본을 충실히 해야 좋은 작품이 나온다는 사실을 새삼 일깨우는 무대였다. 중국 영화감독 왕자웨이(王家衛)의 투자를 받아 화제를 모은 뮤지컬 ‘팬레터’ 얘기다.

팬레터는 지난달 10일 서울 동숭동 동숭아트센터에서 막을 올려 내년 2월4일까지 계속된다. 2015년 이 작품은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콘텐츠진흥원이 주최한 창작뮤지컬 공모 프로그램 ‘글로컬 뮤지컬 라이브:시즌1’에서 최우수작으로 뽑혔다. 지난해 10~11월 서울 필동 동국대이해랑예술극장에서 초연한 당시 좌석 점유율 90%를 기록하는 등 관객의 큰 호응을 얻었다. 이번 공연은 두 번째다.

작품 배경은 1930년대 일제강점기 경성(서울)이다. 작가지망생 정세훈은 문인 모임 ‘칠인회’에서 작가들의 조수 역할을 한다. 그는 칠인회 멤버인 소설가 김해진의 팬이다. 정세훈은 김해진에게 팬레터를 보내며 본명 대신 히카루라는 필명을 쓴다. 김해진은 히카루와 지속적으로 편지를 주고받는다. 히카루가 여성이라고 착각한 김해진은 히카루의 감수성에 반해 그를 사랑하게 된다. 정세훈은 히카루가 가짜였다는 걸 알게 되면 김해진이 분노할 것이라는 생각에 거짓말을 거듭한다.

‘지고지순한 사랑’에 대한 환상을 자극하는 게 인기 비결인 것으로 보인다. 정세훈의 문학에 대한 사랑과 김해진의 히카루에 대한 사랑이 중요한 비중으로 표현된다. 이 사랑이 불러온 광기와 집착의 스토리도 설득력 있게 표현된다. 김해진을 속이는 데 몰입한 정세훈은 자신의 몸에 히카루라는 다른 인격체가 있는 것처럼 행동하기에 이른다. 히카루를 사랑하는 김해진의 마음은 문학활동에 대한 집념으로 나타난다.

촌스럽거나 조잡하지 않은 무대 디자인도 이 작품의 매력이다. 무대는 목조풍으로 과장 없이 심플하게 꾸며졌다. 한지로 제작한 전통적인 문에 사람 그림자를 비추는 방식으로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을 표현해 스토리에 맞게 애잔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3만~6만6000원.

양병훈 기자 h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