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의 상징인 바그너, 전문성악가의 힘 뺀 무대
깊은 가을을 산책하는 신사와 젊은 피아니스트의 음악적 대화


겨울이면 가곡의 노랫말은 가슴을 더욱 더 파고든다. 내용을 자세히 모를지라도 막이 내린 후 귓가에 맴돌던 노래가 입가로 번져 흥얼거리기도 한다. 웅장한 교향곡보다, 솔리스트가 별을 따는 협주곡보다 그 여운의 온기는 가슴에 더 남는다.

지난 28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 베이스 연광철과 피아니스트 김선욱이 함께 ‘독일가곡의 밤’ 무대를 만들었다. 연광철은 슈베르트의 아홉 곡과 브람스의 가곡 여섯 곡, 후고 볼프의 ‘미켈란젤로의 시에 의한 3개의 가곡’을 불렀다. 그들의 동행은 참 아름다웠다.

성악 공연을 할 때 무대 위에 화면을 설치해 자막을 띄우기도 한다. 하지만 이 날의 가사는 프로그램북에만 존재했다. 관객마다 감상방법은 다르겠지만 음악을 ‘듣고’, 책자를 ‘읽는’ 것이 가곡 감상 자세의 매력 중 하나다. 찬찬히 읽는 행간마다 음악이 스며들거나, 어느 대목의 흐름이 가슴을 탁 쳐서 고개 숙여 책자를 보면 거기에는 뇌리에 선명히 박히는 문구가 적혀 있다. 그것이 독일어라 할지라도 가곡은 그 국경을 넘는다.

평소 바그너 전문 가수로 알려진 연광철의 슈베르트는 어떠했던가. 첫 곡 ‘저승으로의 여정’에서 포근한 저음은 이제 막 입장을 끝낸 관객들의 옷깃에 묻은 날선 추위를 떨어뜨렸다. ‘타루타루스의 무리’에서 김선욱의 피아노가 살짝 상기하며 중년 신사의 발걸음에는 젊은 청년이 동행함을 알렸다. 3~10분 가량의 곡들을 연광철은 2~3곡씩 이어 불러 나갔다. 실연한 자가 부르는 ‘봄날에’에서 연광철의 목소리는 추억하는 자의 슬픔을 노래했고, 김선욱의 피아노 가주는 그의 눈물을 닦아주는 듯 했다.

이어진 ‘도나우에서’의 가사 중 ‘불안’과 ‘근심’, ‘야상곡’ 중 ‘구원’과 ‘죽음’ 등은 독일 가곡의 멜랑콜릭한 감정선을 잇게 하는 중요한 단어였다. 신사는 무대에서 한탄하고 슬퍼했고 끝없이 기억했다. 가을이 깊어지면서 브람스 교향곡 일색이던 공연장에 연광철의 목소리에서 브람스 가곡이 고개를 들었다. ‘오, 나 이 밤에 가까스로 일어나’를 제외하고 브람스가 오십대 전후에 쓴 ‘배반’ ‘우리는 거닐었다’ ‘숲 속의 적막’ ‘묘지에서’를 부르는 오십대의 연광철은 젊은 날을 회상하는 브람스의 음악적 자화상 같았다.

시계가 9시 40분을 가리켰을 때, 볼프의 ‘내 영혼이 갈망하던 신의 빛을 느끼게’로 모든 순서는 끝났다. 김선욱의 손이 잠시 동안 허공에 머물렀고, 연광철은 객석의 허공을 잠시 응시했다. 그리고 나서 신사는 앙코르로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바그너의 오페라 ‘방황하는 네덜란드인’과 ‘파르지팔’ 중에서 선별한 세 곡과 한국가곡 ‘기다리는 마음’과 ‘신고산 타령’을 노래했다. 10시를 훌쩍 넘은 시간. 따스한 물이 가슴 속에서 출렁이는 것 같았다.

송현민 음악칼럼니스트 bstsong@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