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칠을 하지 않고 주로 선으로 그리는 회화 기법인 ‘드로잉’은 채색 회화를 위한 습작 등 주변부 예술로 인식될 때가 많다. 그러나 드로잉이 가진 미적 가치에 주목해 이를 독립적인 예술 분야로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늘고 있다. 드로잉이 가진 예술적 잠재력을 탐색해볼 수 있는 전시회가 열렸다.

서울 사간동 금호미술관은 드로잉 작가 10명이 참여하는 기획 전시회 ‘B컷 드로잉’을 오는 12월31일까지 연다. 지난 13일 개막한 이 기획전에는 드로잉 작품 뿐만 아니라 드로잉을 주제로 한 설치 및 영상 작품까지 모두 80여점이 전시됐다. 전시회 참여 작가는 노상호, 문성식, 박광수, 백현진, 심래정, 이정민, 이해민선, 장종완, 지니서, 허윤희 등이다.

‘B컷’은 사진 예술에서 주로 사용되는 용어로 구도나 빛 등이 작가의 의도와 다르게 ‘잘못’ 찍힌 사진을 말한다. 대상의 본질을 더 잘 보여준다는 이유로 오히려 이를 선호하는 사람도 있다. 금호미술관은 “회화나 조각이 A컷이라면 드로잉은 B컷으로서 대상의 본질을 잘 반영하고 있다”는 의미를 전시회 제목에 담았다.

심래정 작가는 과감한 펜 터치로 식인이나 살인을 하는 모습을 괴기하게 그린 ‘식인왕국 시리즈’ 작품 6점을 전시했다. 전시작 ‘식인왕국:생산공장’은 특수 종이에 굵은 싸인펜으로 기묘하게 생긴 기계장치를 그린 작품이다. 이 기계장치에는 두 사람이 부속품처럼 연결돼 있다. 심 작가는 “고통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쾌락이 느껴지는 감정노동을 통해 인간이 ‘소비’되고 있는 상황을 그렸다”고 설명했다. 노상호 작가는 갖가지 드로잉을 그려 이를 옷걸이에 걸어 놓고 관람객이 꺼내 보도록 했다. 쇼핑하는 것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드로잉 작품을 보라는 의미다. 전시 작품 중에서는 드로잉을 주제로 한 영상이나 설치 작품 등도 있다.

전시 작품들은 만화나 소설에 버금가는 풍부한 스토리를 담고 있다. 전시회가 표방하는 것처럼 A컷을 기대하기보다는 B컷을 본다는 생각으로 부담 없이 둘러보기에 알맞다. 관람료는 일반 5000원, 초등힉생부터 대학원생까지 4000원.

양병훈 기자 hu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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