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굴 조각' 개척한 이영섭 씨, 갤러리 마리서 개인전
경기 양평 작업실에서 ‘삼존불’을 제작하고 있는 조각가 이영섭 씨.

경기 양평 작업실에서 ‘삼존불’을 제작하고 있는 조각가 이영섭 씨.

중견 조각가 이영섭 씨(56)는 1998년 우연한 기회에 경기 여주 고달사지 발굴 현장을 지켜봤다. 찬란했던 통일신라 문화가 조선시대 유교라는 이데올로기에 의해 소멸했다가 1000년 뒤 다시 드러나는 과정이 신기했다. 고달사지 옆 작업실에서 수도하듯 유물과 출토의 의미를 고민했고, 잘 만드는 조각가가 아니라 ‘시간성’에 대해 얘기하는 작가가 되기로 작정했다. 그는 땅속의 유적과 유물은 물론 불상, 동자석 파편까지 오브제로 삼아 책에 나오지 않은 조각을 끊임없이 시도했다. 결국 깎고 쪼아내는 조각이 아니라 자연을 거푸집으로 삼는 ‘발굴 조각’이란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고, 미술계 주목을 받았다.

다음달 10일까지 서울 신문로 갤러리 마리에서 펼쳐지는 이씨의 개인전은 이런 도발적인 조각 인생 20년을 입체적으로 조명한다. 죽어라고 조각에 매달린 작가의 삶이 얼마나 치열했는가를 보여준다는 의미에서 전시회 주제를 ‘흙에서 나온 세월, 亞(아)’로 붙였다. 2층 전시장에는 땅속의 기와나 도자기 파편 등 유물을 마사토와 시멘트로 섞어 시간의 흔적을 잡아낸 어린 왕자, 모자상, 마애불, 의자, 곰인형 등 37점을 시기별로 나눠 내보인다.

28일 전시장에 만난 그는 “문화재 발굴이 과거의 시간을 현재로 꺼내는 것이라면 내 작업은 현재의 시간을 과거로 돌려보내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작품은 나무를 깎거나 돌을 쪼고, 주물이나 용접 등으로 금속을 조형화하는 기존 조각의 통념을 완전히 뒤집는다. 먼저 땅 위에 드로잉하고 흙을 파낸 다음 그 속에 퇴적암과 기와, 칠보석 등의 파편을 깔고 모래와 반죽한 시멘트를 채운다. 다시 흙을 덮어 일정 시간 굳힌 뒤 이 시멘트 형상을 ‘고구마 캐듯’ 조심스럽게 캐낸다. 황토물을 입히거나 눈과 코, 입술 등의 표정을 그리면 작품이 태어난다.

흙이 굳어 구멍이 숭숭 나고 유물 파편들이 박힌 작품들은 자연의 갖가지 흔적을 오롯이 드러낸다. 미완성된 듯하지만 세련되고, 성기게 모자란 듯 거칠고 투박하지만 자연스럽고 예스럽다. 무엇보다 오랜 시간이 머문 듯 깊이감도 있다.

작가는 “이런 맛을 내기 위해 숱한 시행착오를 거쳤다”고 했다. “적절한 재료의 배합을 찾는 실험에 20년이 넘게 걸렸습니다. 피카소는 50년 실험을 통해 입체파 그림을 개척했잖아요. 단순히 잘 만드는 테크닉을 넘어 인간 삶의 진정성을 담아내 세상과 소통할 것입니다.”

실제 삶의 다양한 모습을 시간의 질감으로 건져 올린 그의 작품이 지니는 미의식은 현대인에게도 포근하게 다가온다. 목도리가 휘날리는 ‘어린 왕자’를 비롯해 해학미가 넘치는 신라 토우, 고졸미(古拙美)가 잘잘 흐르는 백제 불상과 반가사유상 등은 무의식의 형태로나마 잊히거나 상실한 것들을 그리워하는 현대인의 의식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이씨는 “앞으로 한국의 미의 원형을 ‘발효’시켜 묵묵히 시간을 발굴하는 데 주력하면서 한국 현대조각의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

ⓒ 한경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