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 전시된 행위미술가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의 ‘발칸 연애 서사시’.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 전시된 행위미술가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의 ‘발칸 연애 서사시’.
1967년 말 서울 중앙공보관에서는 괴상한 미술판이 벌어졌다. 우산을 쓰고 앉은 여성의 주위를 촛불을 손에 든 청년들이 빙빙 돌면서 ‘새야 새야 파랑새야’를 부르다가 우산을 찢으며 휴지와 새끼줄로 감고 마구 짓밟았다. ‘비닐우산과 촛불이 있는 해프닝’이란 제목이 붙은 이 희한한 미술은 한국 최초의 ‘행위예술’, 일명 ‘퍼포먼스’로 기록됐다.

이듬해 봄 홍익대 미대를 갓 졸업한 정강자 씨(1942~2017)가 주축이 된 ‘투명풍선과 누드’는 화제를 더 모았다. 삼엄하던 박정희 정권 시절 음악다방에서 토플리스 차림인 정강자의 몸에 풍선을 붙인 이 퍼포먼스는 ‘퇴폐’ ‘불온’ 등의 수식어를 달고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다. 이후 1970년대 초반까지 활발히 전개되던 행위미술은 1972년 10월 유신 전후로 움츠러들었다. 별난 작가들의 튀는 ‘이벤트’ ‘행동의 드라마’ 등으로 이름을 달리하며 명맥을 이어왔다.

국내 행위미술 50년을 회고하는 국제기획전 ‘역사를 몸으로 쓰다’가 지난 22일 경기 과천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시작했다. 중국 현대미술의 거장 아이웨이웨이를 비롯해 푸에르토리코 부부작가 알로라&칼자디야, 설치미술가 박찬경, 임민욱 등 국내외 38개 팀이 참여해 실험적이고 생소한 퍼포먼스 작업 70여 점을 내놨다. 회화 조각 등 전시가 끝나도 작품이 남는 다른 시각예술 분야와 달리 기록으로만 존재해온 퍼포먼스 예술의 흐름을 입체적으로 만날 수 있는 기회다.

인간의 신체와 몸짓을 활용한 출품작들은 한국 사회의 역사와 문화적 맥락을 관통하며 관람객을 반긴다.

아이웨이웨이는 기원전 20년 한나라 유물로 추정되는 도자기를 떨어뜨리는 과정을 보여주면서 “우리는 오래된 것을 파괴해야만 새 세상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마오쩌둥의 말을 인용한다. 거대한 제도와 권력 앞에 선 예술가의 저항을 몸짓 예술로 승화한 것이 이채롭다.

인도네시아 작가 멜라티 수료다모는 수북이 쌓인 붉은 종이에 얼굴을 파묻은 여성을 통해 고통스러운 집단 기억을 상기시킨다. 한동안 미동도 않던 여성이 찬찬히 고개를 들자 얼굴에는 피칠갑이 돼 있다. 방을 가득 채운 피의 흔적은 상실과 고통을 여과 없이 드러낸다.

영상설치 작가 박찬경 씨는 인민 군복을 입은 한 소년이 숲에서 책을 읽고 노래를 부르고, 배회하는 모습을 담은 시적인 퍼포먼스 영상 작품을 내놨다. 그는 “일상적인, 위험하지 않은 북한 이미지야말로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더 위험해 보일 수 있어 그런 맥락에서 보면 좀 더 흥미로울 것”이라고 설명했다.

행위예술을 통해 사회적 발언을 하고 공동체 과제를 언급하는 작품도 눈길을 끈다. 알로라&칼자디야는 비에케스섬을 다룬 단편영화 ‘하프 마스트, 풀 마스트’를 들고 나왔다. 체조선수 23명이 자신의 몸을 깃발처럼 느껴지도록 연출한 이 작품은 미국이 2차 세계대전 후 비에케스섬의 75%를 사격장으로 바꾸면서 일어난 환경파괴 문제를 진지하게 꼬집는다.

아르헨티나 출신 미카 로텐버그는 여성의 노동문제를 특유의 해학적 행위예술로 다룬다. 파스타를 생산하는 과정에서 거듭 재채기를 하다 피노키오처럼 점점 코가 길어지는 여성을 통해 서구 자본주의와 사회적 약자인 여성, 노동자를 대비시킨다.

유고슬로비아 아티스트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의 ‘발칸 연애 서사시’도 사진과 동영상으로 만날 수 있다. 발칸의 드넓은 평야에서 여인들이 유고의 전통민요를 부르며 두 손으로 가슴을 문지른다. 현대사의 질곡과 폭력이 난무했던 세르비아에서 흘러간 발칸 사람들의 애환과 사랑을 퍼포먼스 형식으로 은유한 게 흥미롭다. 내년 1월21일까지.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