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미디어 뉴스룸-MONEY] 숲속에 잠든 최고 권력 '조선 왕릉'…자연미 살아있는 '최고의 뷰'
조선 왕릉은 조선왕조 519년 통치의 역사가 집약된 결정체다. 태조 이성계 이후 역대 27대 왕과 왕비의 왕릉 40기를 들여다보면 ‘왕가의 정치학’부터 당대의 사상과 철학, 미의식을 모두 엿볼 수 있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한 왕조 모든 왕의 무덤이 보존돼 있는 조선 왕릉. 그중 ‘동쪽에 있는 아홉 능’인 동구릉은 조선을 창건한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을 비롯해 24대 헌종과 효현·효정왕후의 ‘경릉’까지 총 아홉 개의 능이 자리한 191만7355㎡ 규모의 왕릉군이다.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조선 왕릉 40기 가운데 가장 많은 능이 모여 있어 조선 왕릉의 다양한 능의 형식과 시대에 따른 변화 양식을 살펴볼 수 있는 곳이다.

입구를 지나 능에 진입하기까지는 ‘속세 공간’이다. 조선 왕릉은 죽은 자가 머무는 공간이면서 산 자와 죽은 자가 만나는 성역이라는 개념 아래 능이 조성됐다. 이에 따라 공간과 동선을 성(聖)과 속(俗)으로 엄격히 나누고 있다. 성역과 속세가 만나는 ‘제향 공간’은 왕릉 입구의 홍살문에서 시작해 정자각(丁字閣)까지 이어진다. 홍살문에 이르면 비로소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왕릉의 풍광을 느낄 수 있다.

정자각은 왕이 선대왕의 제사를 모시던 공간으로, 조선 왕릉의 독특한 건축물로 꼽힌다. 정자각 뒤로 봉분까지는 오롯이 성역, ‘능침 공간’이다. 아래에서 올려다보면 봉분이 잘 보이지 않는다. 언덕과 같은 높은 산비탈이 있을 뿐이다. 평균 높이 해발 53m. 생각해보자. 조선 왕릉에서 최고의 전망은 어디에서 볼 수 있을까. 공간의 주인이 머무는 곳에서 바라보는 풍경일 것이다. 봉분이 유독 높게 조성된 것은 최고 권력자 신분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머무는 자를 위한 최고의 경치를 만들기 위함이었다.

무덤으로서의 길지는 곧 자손의 번식과 일가의 번성으로 연결된다. 왕릉을 조성할 때 최고의 입지를 찾은 배경은 선대왕을 위함이기도 했지만 조선 왕실과 국가의 번영, 후대 왕의 정체성 확립을 위해서도 중요한 이슈였다.

봉분을 중심으로 보자. 뒤쪽으로는 주산(主山)이 있다. 대개 산의 기운이 응축돼 있다는 산의 중허리 산비탈에 있는데, 그 기운을 한데 모아 봉분으로 보내는 특별한 공간이 잉(孕)이다. 의도적으로 흙을 쌓아 기운을 응축한 곳으로, 왕릉에서 가장 강한 에너지가 센 곳이다.

그 기운을 받은 봉분은 좌우로는 청룡과 백호의 산세를 이루고 앞쪽으로 물이 흐르며 맞은 편으로 안산(案山)이, 멀리는 조산(朝山)이 보이는 음택에 입각해 조성됐다. 또한 봉분 주변에는 문인석과 무인석을 비롯해 각종 석물이 배치돼 있는데 새겨진 문양을 통해 조선의 미의식을 분석할 수 있다.

이현주 한경머니 기자 chari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