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은구 기자 egka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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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르띠에·미국 PGA도 반한 '한국식 그릇'
백남준 작품처럼 국위선양하는게 꿈이죠"

음악가 꿈꾸던 '병약한 막내딸'
폐렴으로 학교보다 병원이 친숙해
방구석에서 피아노 치는 게 낙
부모님이 "연습하다 죽겠다"며 걱정
결국 공예가로 진로 바꾸게 됐죠

천식도 이겨낸 도예의 매력
1년 내내 먼지 가득한 작업실
매일 9시간씩 도자기만 빚어
한번 만들면 고칠 수 없는 그릇
원하는 결과물 나올 땐 쾌감 크죠

한국적이면서 모던한 도자기
아름다운 무늬 위해 '결정유'만 고집
갤러리서 판매한 밥·국그릇 '입소문'
개인은 물론 기업·호텔 등서 찾아
2012년부터 '김선미그릇' 본격 판매


"해외 기업·VIP들이 찾을 때마다 예술로 애국하는 것 같아 기쁘죠"

1990년대 초 홍익대 도예과를 졸업하고 프랑스로 유학 간 도예가 김선미는 파리 퐁피두센터(미술관) 1층에 하염없이 서서 책을 정리하고 있었다. 모두 비디오 예술가 백남준에 관한 책이었다.

“퐁피두센터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곳에 백남준 선생님 작품이 있고, 책이 잔뜩 있었어요. 같은 한국인으로 너무 감동하고 울컥했죠. 방문객이었지만 마치 제 책처럼 한동안 서서 책을 가지런히 정리했어요. 그리고 백 선생님처럼은 못 되겠지만 저도 꼭 예술로 뭔가 국위선양을 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백남준과 정명훈 당시 파리 바스티유오페라극장 음악감독, 소프라노 조수미가 유럽에서 이름을 날릴 때 유학한 그는 지금 서울 용산구 한남동에서 ‘김선미 그릇’이라는 매장을 운영하는 대표가 됐다. 밥그릇, 국그릇, 접시 등 식기와 찻주전자, 컵 등 그가 직접 빗고 구워낸 생활도자기를 파는 매장이다.

다섯 걸음이면 끝에서 끝까지 갈 수 있는 작은 매장이지만 찾는 고객은 작지 않다. 아모레퍼시픽과 CJ, 까르띠에, 중국 완다그룹, 미국 프로골프협회(PGA) 등이 거쳐간 고객이다. 지난 4월에는 파크하얏트호텔 서울이 24층 라운지 바 ‘더 라운지’를 재단장하면서 그릇과 컵을 모두 김선미 그릇 제품으로 바꿔 화제를 모았다.

하루 종일 피아노 치던 집요함이 도자기로

김씨는 1968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5녀 1남 중 막내딸이다. 몸이 무척 약했다. 그의 말로는 “한 번 죽었다”고 했다. “태어나서 숨을 안 쉬어 천으로 덮어놓았는데, 조금 있다 울음을 터뜨리며 살아났다고 해요.” 어릴 때 폐렴을 앓고 나서 천식이 지병이 됐다. 초등학교 때는 2년 가까이 학교에 못 가 졸업을 못 할 뻔했는데, 아버지가 빌어 겨우 졸업했다고 한다. 고등학교 때는 항상 교실이 1층이었다. 숨이 차서 계단을 오를 수 없는 그를 위해 김씨의 반만 특별히 학년이 바뀌어도 1층에 있도록 배려해준 덕이다.

그는 “고등학교 때도 학교를 잘 못 가고, 눈을 떠보면 응급실일 때가 많았다”며 “성격이 우울해질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위로가 돼준 것은 오로지 음악이었다. ‘클래식 광(狂)’인 아버지의 영향이기도 했다. 방구석에서 음악을 듣거나 온종일 피아노를 쳤다. 피아니스트가 되는 게 꿈이었다. 김민 서울대 교수의 어머니이자 이화여전에서 피아노를 전공한 고(故) 이재형 씨가 피아노 선생님이었다. 재능도 있었다. 악보를 보지 않고도 음을 들으면 그대로 따라 칠 수 있었다.

하지만 부모님의 반대가 거셌다. 피아니스트가 되려면 종일 피아노 앞에 앉아 죽도록 연습해야 하는데, 그러면 정말 죽을 수도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좋아하는 음악은 취미로 하고, 그림이나 공예가 어떻겠느냐고 했다. “지금은 아버지 말씀대로 음악을 취미로 남겨놓아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때는 정말 원망이 컸어요.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회한이 남아 피아노 음악만 들으면 내가 치는 것 같고, 동네 피아노 선생님으로 남아도 그때 피아노를 고집했으면 어땠을까 생각하곤 했죠.”

아픈 몸으로 종일 피아노를 치던 집요함과 집중력은 어디 가지 않았다. 지금도 김 대표는 경기 고양시 일산에 있는 작업실 겸 집에서 매일 오전 8시부터 오후 5시까지 일한다. 한남동 매장에 오는 일은 한 달에 한두 번. 매장 일은 매니저에게 일임하고 밥 먹는 시간 빼고는 작업실에서 거의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매일 아침 가마를 여는 일부터 시작한다. 도자기를 빚어 12~15시간 가마에 굽고, 다시 그만큼의 시간 동안 식혀 아침에 가마를 여는 것이다. “원하는 대로 결과물이 나오느냐 아니냐에 따라 그날 기분이 달라져요. 굉장히 스트레스 받는 작업이지만 생각한 대로 나왔을 때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는 도자기 공예에는 ‘(한 번 만들면) 고칠 수 없는 매력’이 있다고 했다. 그래서 마약 중독처럼 아침마다 계속 가슴을 졸이며 가마를 열게 된다는 것이다.

한국적이면서 모던한 생활도자기 만들어

[人사이드 人터뷰] 생활도자기 대중화 앞장선 김선미 도예가
김 대표는 “천식으로 고생하던 사람이 도예를 직업으로 삼은 것은 참 아이러니”라고 했다. 흙을 빚어 도자기를 만드는 작업실은 1년 내내 황사가 부는 곳처럼 먼지가 가득하기 때문이다. “병원에 실려 갔을 때 직업이 도예가라고 하면 의사들이 다들 놀라곤 해요.” 그런데 도자기를 만들면서 차츰 성격이 밝아지고, 건강도 좋아졌다고 한다.

처음에는 그도 ‘도자 조각(ceramic sculpture)’을 만들고 전시회를 여는 예술가의 길을 가려 했다. 줄여서 ‘도조’라고 하는 도자 조각은 물건을 담는 그릇이 아니라 도예라는 작업을 통해 새로운 조형물을 만들어내는 현대미술의 한 갈래다. 파리 에콜 데 보자르와 파리 고등현대미술학교에서 공부한 그는 프랑스에서 두 차례 개인전을 열고 1997년 한국에 돌아왔다. 한국에서도 종로갤러리(1997년)에서 전시회를 열며 도조 예술가로 이름을 알렸다. “그때만 해도 일상생활에서 쓰는 생활도자기라는 개념이 없었어요. 홍대 도예과를 4년 다니는 동안에도 예술 작품으로서 도자 조각을 배우는 과정이 전체 과정의 90%였어요.”

어느 순간 부수적인 일로 사람들이 쓸 수 있는 도자기를 만들어 보고 싶었다고 한다. 마침 1997년 한국에 외환위기가 터진 뒤였다. 그림이 안 팔리니 갤러리들도 그릇이나 장신구 같은 공예품을 앞세워 전시하고 팔기 시작했다. “저도 한 갤러리에 밥그릇과 국그릇을 만들어 보냈는데 꽤 많이 팔렸다고 하더라고요. 이게 뭐라고 팔리나 너무 신기했습니다.”

생활도자기를 잘 만든다는 소문이 나면서 다른 갤러리에서도 연락이 왔다. 한동안은 그렇게 갤러리를 통해 그릇을 팔았다. 갤러리에서 개인, 기업, 호텔 등에서 주문을 받아 김 대표에게 만들어달라고 재요청하는 식이다. 영업하거나 가게를 운영할 필요 없이 도자기 만드는 데만 집중하면 되니 편하기는 그때가 제일 편했다고 한다. CJ가 2001년 제주도에 나인브릿지 골프장을 열 때 오픈 기념 선물로 주문한 것이 김 대표가 만든 그릇이었다. 서른 가지 그릇으로 구성된 세트를 5000여 개 만드는 작업이었다. “일을 도와주는 직원 5~6명이 달라붙어 석 달 동안 밤낮으로 만들었어요. 좋은 경험이었지만 다음부터는 작업실 규모에 맞는 일을 해야겠다는 교훈도 얻었죠.”

김 대표는 2003년 9월 서울 인사동에 전통공예빌딩인 ‘쌈지길’이 문을 열 때 ‘담음’이란 이름으로 처음 매장을 냈다. 하지만 쌈지의 경영난과 그에 따른 쌈지길 매각으로 분위기가 처음 기획 의도와 달라지면서 2년이 채 지나지 않아 매장을 서울 성북동 주택가로 옮겼다. 매장 이름 없이 ‘리유’라는 카페 한구석에 공간을 얻어 그릇을 팔았다. 주변에 대사관이 많아 외국인들이 본국으로 돌아가면서 대량으로 그의 그릇을 사 가기도 하고, 한국 외교부에서도 외빈 선물용으로 그의 그릇을 많이 샀다고 한다. 김선미 그릇이란 브랜드는 2012년 매장을 한남동으로 옮기면서 만들었다.

김 대표의 그릇은 ‘한국적이면서도 모던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색채나 일부 모양에선 한국의 청자나 백자를 연상시키지만 디자인은 과감하고 실험적이다. “매일 먹는 밥이지만 조금 재미있는 형태의 그릇이 앞에 놓여 있으면 더 즐거운 식탁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항상 고민해요. 무엇을 보든, 그릇과 전혀 상관없는 전시회를 가든 눈에 들어온 아이템들이 그릇이 되면 어떨까 상상해보기도 하고요.”

김선미 그릇의 은은하면서도 아름다운 무늬는 ‘결정유’ 유약을 고집하는 데서 나온다. 결정유는 무늬가 아름답지만 온도 등 조건을 못 맞추면 잘 흘러내려 망치기 쉽다. 흘러내린 유약으로 도자기가 바닥에 달라붙어 못 쓰게 되기도 한다. 아무리 손재주 좋은 그도 50~60%만 건지는 수준이다. 그는 “어떨 때는 1~2주 동안 작업한 것을 다 망칠 때도 있다”고 했다.

김 대표는 외국 기업이 그릇을 사 갈 때 애국하는 것 같아 가슴이 벅찬다고 했다. 2014년 완다그룹은 백두산에 완다리조트를 열 때 한식 레스토랑에서 쓸 그릇으로 김선미 그릇을 골랐다. 공개 입찰에서 광주요 같은 큰 기업과 경합해 이뤄낸 결과다. 2009년 양용은 선수가 미국 PGA챔피언십 골프대회에서 우승했을 때는 미국 PGA가 파티를 열면서 참석한 선수들에게 줄 선물로 그의 그릇 100세트를 주문했다. 까르띠에가 VIP 고객에게 줄 선물로 김선미 그릇을 주문한 적도 있었다. 김 대표가 수줍게 물었다.

“이런 것도 외화벌이라고 할 수 있는 거죠? 저 잘하고 있는 것 맞나요?”

■ 생활도자기의 역사

작품으로만 보던 도자기…90년대 외환위기 후 식탁에 올라

김선미 도예가가 빚은 그릇.
김선미 도예가가 빚은 그릇.
1990년대 들어 도예가 사이에서 일상생활에서 쓰이는 생활도자기를 만들자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그 전까지만 하더라도 감상을 목적으로 한 도자기와 비교해 그릇, 컵 등 생활도자기를 낮춰 보는 풍토가 있었다.

서울 한남동에서 ‘김선미 그릇’을 운영하는 도예가 김선미 대표를 비롯해 이윤신 이도 회장 등 생활도자기 1세대가 이런 풍토를 바꿔놓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 회장은 홍익대 도예과와 일본 교토시립예술대학원을 나와 1990년 1인 공방으로 이도를 시작했다. 인사동 쌈지길에 이도라는 이름의 독립 매장을 세웠고, 소격동을 거쳐 지금의 가회동 본점으로 옮겨왔다. 경기 여주 이도 세라믹 스튜디오에서 50여 명의 도공이 도자기를 생산할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

김선미 그릇에서는 밥공기부터 컵까지 400여 종류의 생활도자기를 팔고 있다. 김 대표는 “생활도자기는 똑같은 디자인도 생산 과정에서 조금씩 형태와 무늬가 다르다”며 “처음에는 왜 모양이 똑같지 않느냐는 사람도 있었지만 지금은 이를 매력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늘었다”고 했다.

기업으로는 ‘아올다’라는 브랜드를 갖고 있는 경기 이천의 도자기 기업 광주요 역시 생활도자기 대중화에 기여했다. 1991년 국내 도자기 시장에 진출한 광주요는 1996년 도자문화연구소를 설립한 데 이어 2004년 생활자기 브랜드 아올다를 론칭했다. 광주요는 생활도자기를 활성화하기 위해 주류 브랜드인 ‘화요’, 한식레스토랑 ‘비채나’ 등으로 사업을 확대하고 있다.

생활도자기는 다른 그릇과 섞어 설거지를 하더라도 쉽게 깨지면 안 되고, 도자기라고 너무 무거워서도 안 된다. 김 대표는 “그릇이라는 틀 안에서 조금씩 변형해 나름의 멋을 내는 게 관건”이라며 “그렇다고 너무 튀어선 안 되고 음식을 돋보이게 하는 목적에 충실해야 한다”고 말했다.

임근호 기자 eige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