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향기] "늙은 신의 마지막 작품" … 유배객도 설레게 한 '서해의 해금강'
백령도는 너무도 익숙한 이름의 섬이다. 분단의 상징이고 늘 위태로운 분쟁의 현장이라 자주 언론에 오르내리는 까닭이다. 연평도와 함께 잊을 만하면 국지전이 발생해 이 나라가 아직 전쟁 중인 나라라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섬이다. 이 땅에 아직 평화는 멀다. 휴전 상태가 길어져서 잊고 있을 뿐 여전히 내전이 진행 중인 분쟁국. 언제나 이 땅에 온전한 평화가 꽃 피게 될까. 백령도에서 북녘의 장산곶까지 배 띄워 갈 수 있게 될까.
[여행의 향기] "늙은 신의 마지막 작품" … 유배객도 설레게 한 '서해의 해금강'
백령도 콩돌 해변에서 그대에게 편지를 씁니다
나에게 그대는 언제나 처음이고 끝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다시 그대를 찾지는 않겠습니다

내 평생 사랑을 찾아 헤매어
사랑을 얻지 못하더라도
다시 그대를 찾지는 않겠습니다

그대가 가난에 대하여
그대가 가난하게 사는 행복에 대하여
말할 수 있을 때
가난한 그대 삶에 대하여 당당해질 때
다시 그대를 찾겠습니다

저무는 바닷가 저무는 해변에 나와
그대에게 편지를 씁니다
나에게 그대는 언제나 처음이고 끝입니다

강제윤 ‘가난한 행복’


사랑을 완성한 흰 깃털의 섬, 백령도

아득히 먼 날이었다. 만주 벌판을 누비던 사내 하나 있었다. 사내는 밤새 말을 달려 황해도 장산곶까지 찾아왔다. 장산곶 마을에는 그리운 여인이 살고 있었다. 사랑을 나누고 깊이 잠들었다가 눈 뜨니 여인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꿈이었던 것일까. 사내는 연인을 찾아 미친 듯이 헤매고 다녔다. 끝끝내 찾지 못하고 수심이 깊어가던 밤. 사내의 꿈속으로 흰 새 한 마리가 날아들었다. 흰 새는 사내를 여인이 갇혀 있던 섬으로 태워다 주었다. 마침내 재회한 연인은 섬에서 사랑을 완성했다. 연인들을 다시 이어준 흰 새는 깃털 하나만을 남기고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 그렇게 연인이 살던 섬은 흰 깃털(白翎)의 섬이 되었다. 백령도(白翎島).

서울보다 평양이 가까운 섬, 백령도에서 장산곶까지는 불과 13㎞. 손에 잡힐 듯이 가깝지만 보이지 않는 장벽에 막혀 건널 수 없는 땅이 된 지 오래다. 백령도는 오랜 세월 황해도 장연군에 속했지만 지금은 인천시 옹진군으로 소속이 바뀌었다. 인천에서는 229㎞ 거리. 인천항에서 출항한 여객선이 연평도를 지난 후부터 마주하는 풍경은 내내 북한 황해도의 땅이다. 섬들도 모두 황해도 옹진군의 순위도, 어화도, 창린도, 비암도, 기린도, 마암도 등과 장연군 월내도, 육도 등 북한의 영토다.

기암괴석이 즐비한 해상 절경지
한국의 3대 해상절경 중 하나인 ‘두무진’. 두무진은 형제바위, 코끼리바위 등 기암괴석이 줄지어 서있어 백령도의 꽃이라 불린다.
한국의 3대 해상절경 중 하나인 ‘두무진’. 두무진은 형제바위, 코끼리바위 등 기암괴석이 줄지어 서있어 백령도의 꽃이라 불린다.
백령도는 선사시대 유적이 발견됐을 정도로 역사가 길다. 삼국시대에는 고구려 땅이었고 곡도(鵠島)라 불렸다. 고대부터 백조, 따오기 등 새들의 섬이었던 것일까. 고려 태조 때 백령도란 이름을 얻었고 고려 말 왜구의 침략이 심해지자 섬 주민들은 육지로 이주해야 했다. 한동안 섬은 왜구들과 해적들의 근거지가 되기도 했었다. 조선시대 간행된 ‘백령진지’에는 두무진이 “해로의 지름길이요. 배 대기 편리하여 해적의 출입하는 문지방”이란 기록이 남아 있다. 조선 광해군 때 비로소 백령진이 설치되고 주민들이 다시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 지금의 면소재지가 있는 진촌리에 백령진이 있었는데 진장은 정삼품의 당상관인 수군 첨절제사였다.

백령도 여행자들은 두무진과 콩돌해변, 사곶해변, 심청각 등을 빼놓지 않고 찾는다. 그중에서도 서해의 해금강, 두무진은 백령도의 꽃이다. 홍도와 거문도 백도와 함께 한국의 3대 해상 절경 중 하나로 꼽힌다. 두무진은 장산곶과 정면으로 마주보고 있는데 형제 바위, 코끼리 바위, 촛대 바위, 신선 바위 등의 기암괴석들이 금강산 만물상처럼 줄지어 서 있다. 그래서 광해군 때 유배 왔던 이대기는 두무진을 ‘늙은 신의 마지막 작품’이라고 찬탄하기도 했었다. 두무진 절벽의 해군 초소들이 있는 자리가 과거에는 해적의 출몰을 감시하던 요망대였다. 두무진의 기암괴석은 해상 유람선으로도 볼 수 있고 육로로도 탐방할 수 있다. 사람이 적거나 물결이 높아 유람선이 안 뜨는 날은 육로로 탐방하는 것만으로도 그 절경을 감상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콩알처럼 작고 동그란 자갈들이 해변을 수놓고 있는 콩돌 해변 또한 더없이 평화롭고 아름답다. 넋 놓고 앉아만 있어도 좋은 곳이다.

심청이 연꽃타고 올라왔던 마을
아스팔트 활주로만큼 단단해 천연비행장으로 쓰인 사곶해변.
아스팔트 활주로만큼 단단해 천연비행장으로 쓰인 사곶해변.
백령도 진촌리에는 심청각이 있다. 섬에 뚱딴지같이 웬 심청각일까 싶지만 백령도가 심청전의 무대라는 전설이 있어서 생긴 것이다. 백령도뿐이랴. 곡성에는 심청전의 원형인 원홍장 설화를 바탕으로 심청마을이 생겼고 부안군에서는 위도 앞 바다의 임수도 인근 해역이 심청이 몸을 던졌던 인당수라 주장하며 심청이 설화를 자원화하려 노력 중이다. 아무튼 옹진군에서 주장하는 인당수는 장산곶과 두무진 사이 바다, 두무진에서 15㎞ 지점이다. 백령도 사람들도 옛날부터 이곳을 ‘인당수’ 혹은 ‘임당수’라 불러왔는데 어부들에게 물살 세고 험하기로 악명 높은 곳이었다. 백령도와 대청도 사이 바다에는 연봉 바위라는 작은 무인도가 있는데 심청이가 연꽃을 타고 바닷속에서 솟아올랐다는 곳이다. 백령도에는 연화리라는 마을도 있다. 심청이가 연꽃을 타고 떠 내려와 땅에 올랐던 마을이라고 전한다. 설화가 현실의 무대를 빌려 생명을 얻은 것인지 현실의 지명들이 설화를 만들어낸 것인지 알 길은 없지만 아귀가 딱 맞는 지명들임에는 분명하다.

서울보다 평양이 더 가까운 평화가 간절해지는 섬, 백령도
콩알처럼 작고 동그란 자갈들이 해변을 수놓은 콩돌해변.
콩알처럼 작고 동그란 자갈들이 해변을 수놓은 콩돌해변.
나그네는 심청전의 진짜 무대가 어디인지에는 별 관심이 없다. 구전 설화이고 소설인데 그 무대가 어디인들 무슨 상관이랴. 하지만 심청각에 전시된 내용들은 불편하다. 너무 기괴해서 섬뜩하기 때문이다. 충과 효의 덕목을 동일시해 맹목적인 충효를 강요하던 왕조 시대에는 심청의 효도가 찬양받을 만한 이야기였겠지만 지금 시대에도 심청의 효도를 본받도록 하기 위해 심청각을 만들었다는 건립 취지에는 도저히 공감할 수 없다. 눈먼 아비의 눈을 뜨게 해주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판 것이 어찌 효도이겠는가. 그런 불효가 어디 또 있겠는가. 심청은 자식을 소유물로 여기고 백성을 종으로 여기던 왕조시대 충효 이데올로기의 희생양일 뿐이다. 그런데 그런 효를 이 시대 사람들이 본받으라고!

게다가 심청각에 전시된 또 다른 효행 이야기들은 더 끔찍하고 엽기적이다. 시아버지를 살린 며느리 이야기를 보라. “어느 때 시아버지가 산 고갯길에서 술에 취해 잠들어 있었다. 마침 근처를 지나가던 호랑이가 시아버지를 잡아먹으려고 했다. 며느리는 업고 있던 아이를 호랑이게 던져 주고 시아버지를 살렸다. 그 사실을 안 남편이 아내에게 잘했다고 칭찬하며 절을 했다. 며느리의 효성에 감동한 호랑이가 아이를 살려 주었다.”
진촌리 심청각의 효녀 심청상.
진촌리 심청각의 효녀 심청상.
술주정뱅이 시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죄 없는 어린아이를 호랑이의 입에 던져 준 행위를 효도라고 버젓이 전시해 본받으라니 이런 반생명적인 효도 교육이 어디 있단 말인가. 어떠한 생명도 존중하고 사랑하게 만드는 교육이야말로 진정한 효 교육이 아닐까. 이런 잔혹한 전시내용은 수정돼야 마땅하다.

백령도의 명물인 메밀냉면
백령도의 명물인 메밀냉면
나그네에게 백령도에서의 점심은 늘 냉면이나 칼국수다. 섬에서 해산물이 아니라 웬 면 요리지 싶겠으나 이유가 있다. 육지인들은 섬이라면 온통 바다만 생각한다. 하지만 섬도 육지의 일부다. 그래서 먹거리는 바다보다 농토에 기대는 것이 많다. 백령도는 농토가 넓어서 대표 음식도 바다 것이 아니라 땅에서 나는 것이다. 바로 메밀 냉면과 메밀 칼국수다. 메밀 칼국수의 면발은 너무 부드러워 목으로 넘어가면서 끊어질 정도다. 냉면도 순도 60%의 진짜 메밀 면이다. 내륙의 무늬만 메밀냉면과 차원이 다르다. 메밀이 찬 성분이 있다. 그래서 메밀 냉면이든 국수든 백령도 메밀 요리에는 들기름이 빠지지 않는다. 들기름을 곁들이면 소화가 잘 되기 때문이란다. 메밀 요리는 백령도 여행자가 꼭 맛봐야 할 음식이다.

천연기념물인 사곶해변

근래까지도 백령도의 백사장에서는 수시로 비행기들이 뜨고 내렸다. 만화 같은 이야기지만 사실이다. 아스팔트로 포장된 활주로만큼이나 단단해서 C130 대형 수송기도 이착륙할 수 있었던 백사장. 사곶해변. 문화재청에서도 “이탈리아 나폴리에 있는 것과 더불어 전 세계적으로 단 두 곳에서만 볼 수 있는 특수한 지질”이라고 그 가치를 인정해 1997년 천연기념물 391호로 지정했다. 6·25전쟁 때 처음 비행장으로 이용된 사곶해변은 1990년대 초반까지도 수송기들이 1주일이면 몇 번씩 뜨고 내렸다.

사곶해변은 언뜻 평범한 모래밭처럼 보이지만 그저 흔한 모래가 아니다. 규암 가루들이 두껍게 쌓여서 만들어진 백사장이다. 다른 지역의 백사장과 달리 사곶해변이 천연비행장 역할을 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잘게 부서진 규암 알갱이들로 이뤄져 있었기 때문이다. 규암은 도자기나 유리의 원료가 되는 석영이 주성분인 아주 단단한 돌이다. 그래서 이 모래밭은 바닷물을 머금으면 아스팔트처럼 단단해져 활주로 기능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사곶해변이 지금 썩어가고 있다. 해변 곳곳에서 발이 푹푹 빠지고 모래밭을 파보면 시커먼 뻘들이 스며들어 갯벌화되고 있다. 이제 더 이상 천연비행장으로 기능할 수 없게 됐다. 사곶해변에 들어갔다가 빠져나오지 못하는 차들도 많다. 그래서 렌터카 업주들은 여행객들에게 차를 몰고 사곶해변에 들어가지 말라고 경고할 정도다. 세계적인 보물이자 천연기념물이 어쩌다 이 지경이 됐을까. 한국농어촌공사가 백령도에 간척사업을 한 뒤부터다. 간척을 위해 제방을 만들고 대청도 쪽에서 밀려오던 조류의 흐름이 끊기자 조류를 따라 밀려왔다 조류를 타고 빠져나가던 오염물들이 그대로 해변에 스며들게 된 것이다.

800여억원의 예산으로 한국농어촌공사가 1991년 시작해 2006년 완공한 이 간척사업으로 4.76㎢의 갯벌이 사라지고 간척지와 백령호가 생겼지만 농업용수 확보에는 실패했다. 담수호로 만든 백령호의 염분 농도가 기준치보다 무려 1만7000배 이상 높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결국 농사 지을 물이 없으니 간척지 땅은 논이 되지 못하고 황무지로 버려져 있고 백령호는 오·폐수가 유입되고 망둥이, 숭어 같은 바다물고기나 사는 오염된 호수로 방치돼 있다. 간척 사업 전 갯벌은 김 양식과 굴 양식으로 어민들에게 큰 소득을 안겨줬고 꽃게와 가자미 등이 넘쳐나는 황금어장이었다. 간척이 결국 수백억원 혈세를 낭비해 황금 갯벌을 없애고 천연기념물 사곶해변까지 훼손해 버렸다. 백령도의 보물이 이대로 사라지도록 놔둬야 하는 걸까. 나그네는 안타까운 마음에 내내 사곶해변을 서성이며 떠나지 못한다.

여행메모

백령도의 명물인 메밀칼국수
백령도의 명물인 메밀칼국수
백령도로 가려면 인천항연안여객터미널에서 배를 타면 된다. 하루 1편 오전 9시30분에 운항하며 4시간 정도 걸린다. 소청도와 대청도를 거쳐 12시30분께 백령도 용기포항 여객터미널에 도착한다. 대인 왕복 13만3000원, 소인 왕복 6만6500원. 돌아오는 배편은 용기포항 여객터미널에서 오후 1시30분에 출발한다. 예약은 고려고속훼리 홈페이지에서 하면 된다. 백령도의 진짜 맛은 해산물이 아니다. 메밀 냉면이다. 들이 넓은 백령도에는 메밀밭이 지천이다. 백령도 장촌마을 삼거리 허름한 냉면집, 기막힌 맛의 비밀 메밀 냉면을 먹었다. 주인장은 점심때만 잠깐 식당문을 열고 이내 닫아 버린다. 주문을 받으면 직접 면을 뽑아 삶아 내는 그 메밀면의 구수한 향을 잊을 수 없다.

강제윤 시인은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 섬 답사 공동체 인문학습원인 섬학교 교장. ≪당신에게 섬≫ ≪섬택리지≫ ≪통영은 맛있다≫ ≪섬을 걷다≫ ≪바다의 노 스텔지어, ≪파시≫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