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화동 문화선임기자
서화동 문화선임기자
오랫동안 참선 수행을 한 고승을 만나면 묻고 싶어서 입이 근질거리는 게 있다. “깨달았습니까?” 속인으로선 수행의 지난한 과정보다 결과가 더 궁금해서다. 당대 제일의 판소리 명창을 만나니 똑같았다. “득음(得音)은 하셨나요?” 참지 못하고 물었더니 대답이 뜻밖이다. “그게 얻어졌다고 가만 있나요. 연습을 안 하면 그 소리가 똑같이 안 나옵니다. 그 세계로 더 가보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은데 쉽지 않네요.”

안숙선 명창(68). 전북 남원에서 태어나 여덟 살 때 국악을 시작했으니 올해로 국악 인생 60년이다. 안 명창은 스승 복이 많은 사람이다. 우선 국악 집안 출신이다. 판소리 명창 강도근이 외숙, 가야금 명인 강순영이 이모, 대금산조 명인 강백천이 외당숙이다. 이모의 손에 이끌려 남원국악원의 주광덕 명인에게 판소리 기초를 배웠고, 강도근에게 흥보가 적벽가 춘향가 심청가 수궁가를 익혔다. 강순영에게선 가야금 산조와 병창을 공부했다.

 김영우 기자 youngwoo@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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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 무렵 서울로 올라와서는 김소희 국창(國唱) 문하에서 흥보가·춘향가를, 박귀희 명창에게 가야금 병창을 배웠다. 정광수의 수궁가, 박봉술의 적벽가, 성우향의 심청가까지 익혀 판소리 다섯마당을 모두 섭렵했다. 1986년부터는 판소리 완창 발표를 시작해 다섯마당을 차례로 소화해냈다. 박동진, 오정숙 명창만 갖고 있던 다섯마당 완창의 대기록을 젊은 소리꾼이 해낸 것이다. 1997년에는 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 산조 및 병창 예능 보유자(인간문화재)로 지정됐다.

그런 안 명창도 “나, 득음했소”라고 자신있게 말하지 못한다. 왜 그럴까. 안 명창을 서울 서초동 국립국악원과 세곡동 자택 연습실에서 만났다.

▷득음에 대한 말씀이 뜻밖입니다.

“저 스스로를 제가 잘 아니까요. 젊었을 땐 다섯마당을 완창해야 한다고 목표를 세워서 저 스스로 절실했습니다. 그런데 나이를 먹으니 힘들어요. 판소리라는 게 안 하면 잊어버리니까 다시 해야 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있죠.”
김영우 기자 youngwoo@hankyung.com
김영우 기자 youngwoo@hankyung.com
▷득음이란 게 뭡니까.

“판소리 이론가인 신재효 선생(1812~1884)의 ‘광대가’에 보면 건성으로 하는 소리인지 아닌지 알 수 있는, 판소리의 절대원칙으로 지켜야 할 네 가지가 있어요. ‘광대라 하는 것이 제일은 인물치레, 둘째는 사설치레, 그 지차 득음이요 그 지차 너름새라’고 했습니다. 인물치레는 외모만 얘기하는 게 아니라 인간 됨됨이나 판소리를 담을 수 있는 그릇을 말합니다. 만정 선생님(김소희)이나 윗대 선생님들이 다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공공 장소에서 노래를 부르려면 본인의 삶에 대한 기본이 있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사설은 그 내용을 잘 파악하고 불러야 한다는 것이고, 득음은 큰 소리와 작은 소리, 사랑과 슬픔, 실제 소리는 물론 상상의 소리까지 낼 수 있는 기교를 말합니다.”

▷신재효의 ‘광대가’에선 ‘득음이라 하는 것은 오음(五音)을 분별하고 육률(六律)을 변화해 오장에 나는 소리 농낙하여 자아낼 제’라고 했던데요.

“큰물이 흐르는 것을 어떻게 표현해 나갈 것인가 한 번 생각해봅시다. 선생님들의 소리를 보면 물이 그냥 졸졸 흐르지 않고 깊은 속에서 ‘꾸구궁’ ‘뻐어엉’ 하고 울리는 걸 느낄 수 있어요. 소리꾼은 좌중을 한순간에 울리고 웃겨야 하고, 구성진 목소리로 그럴듯하게 속여 넘겨야 합니다. 꽃이 핀 것을 실제보다 더 과장되게 표현해야 하고요. 그래서 넓을 광(廣) 큰 대(大), 광대인데 광대 노릇이 그만큼 힘들더라 하는 게 신재효 선생의 광대론입니다. 여자는 남자처럼 소리가 우렁찬 것도 아니어서 배에서 소리가 넘어오게 해야 하니 더 힘들어요.”

▷단지 소리의 기교만을 말하는 게 아니군요.

“세상사에는 겉과 속이 있는데 이면의 소리까지 들려줘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려면 삶의 희로애락을 알고 그걸 소리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해요.”

▷깨달음을 얻기 위한 수행과 비슷한 것 같습니다.

안숙선 명창 "득음은 신기루 같아…판소리 달인도 연습 안하면 금세 잃죠"
“깨달음을 얻기 위한 수행이 쉽겠습니까. 소리도 마찬가지예요. 득음이란 수천, 수만 번의 반복 연습을 통해 어떤 예술적 깨달음에 도달하는 것인데 그 세계를 쉽게 경험했다고 할 수 없지요. 어느날 갑자기 그런 소리(득음)가 나올 수도 있지만 그게 한 번 얻었다고 가만히 있나요. 길을 잘 들인 차는 고속도로를 씽씽 달리는데 잘못 길들인 차는 속도를 못 냅니다. 잘못 길들인 차가 안 되려면 끝없이 연습하는 길뿐입니다. 그 길에선 꾀를 부리면 안 돼요. 그러면 바로 표가 나서 듣기 싫어지거든요. 그런 ‘꾀목’으로 소리를 하면 ‘저 사람, 연습을 안 했군’ 하고 귀신같이 알아듣습니다. 속일 수가 없어요.”

맬컴 글래드웰은 베스트셀러 《아웃라이어》에서 미국 심리학자 앤더스 에릭스의 연구 결과를 인용하며 ‘1만 시간의 법칙’을 제시했다. 어떤 분야의 전문가가 되려면 최소한 1만 시간의 훈련이 필요하다는 법칙이다. 1만 시간은 매일 3시간씩 훈련할 경우 약 10년, 하루 10시간씩 투자하면 3년이 걸린다. 하지만 안 명창은 “판소리 명인이 되려면 60년이 아니라 70년, 80년 연마해야 할 것 같다”며 “오로지 연습뿐”이라고 했다. 1만 시간이 아니라 6만 시간, 10만 시간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그는 “소리 연습을 너댓 시간씩 해야 하는데 몸이 의욕을 받쳐주지 못하니 답답하다”고 했다.
안숙선 명창 "득음은 신기루 같아…판소리 달인도 연습 안하면 금세 잃죠"
▷국악은 어떻게 시작하게 됐습니까.

“어릴 때 학교에 갔다 오면 이모 어깨도 주무르고 다리도 밟아드리고 하다가 가야금을 먼저 배웠어요. 줄풍류 48장을 처음부터 뜯고 튕기고 짓고 하는 과정을 배우는데 손에서 피가 났죠. 가야금에도 피가 튀어 있었어요. 그래도 이모가 하라니까 다 했어요. 그땐 그래야 하는 줄 알았으니까요.”

▷어릴 때부터 ‘아기명창’ ‘소녀명창’으로 유명하셨다면서요.

“가르치는 대로 따라한 걸 보면 좋아했던 것 같긴 한데 국악천재니 아기명창이니 하는 것은 과장된 것 같아요. 그땐 국악인이 많지 않았어요. 전국적으로 광주엔 누구, 대구엔 누구, 서울엔 누구 있는데 누가 소리, 춤, 악기에 능하다는 말씀을 어른들이 하신 기억이 납니다. 지금처럼 대학에서 해마다 국악인이 쏟아지는 시대가 아니었으니까 조금 소리를 한다 싶으면 천재라고 붙여주지 않았을까요.”

▷스무 살 무렵 서울로 와선 뭘 했습니까.

“국립국악협회 회원이 된 게 1968~1969년 무렵입니다. 그땐 매일 학원에 가서 김소희 선생님에게 소리를 배우는 게 가장 큰 일이었죠. 선생님 공연이 있으면 어쩌다 끼어서 무대 경험도 하고, 방송사가 주최하는 대회에도 나갔습니다. 민요합창도 했고요. 외국인이 많이 오는 워커힐호텔의 민속공연에 참가해 용돈을 벌어서 살았어요. 그러다 1979년 국립창극단에 입단하면서부터 월급을 제대로 받았고요. 한국의집 상설 공연에도 나갔죠. 그런 무대가 수련 기간이었어요.”

▷국악을 평생의 업으로 삼기로 한 것은 언제입니까.

“국립창극단에 들어가서 확신이 생겼습니다. 창극 전문 극단이 없을 땐 자신감도 확신도 없어서 집안이 좀 나아지면 관둘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창극단에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명창들이 계셨고, 그분들이 살아계시는 동안에 ‘고쩨’(특정 명창 특유의 판소리)를 배워야겠다고 욕심 냈죠. 그때부터는 공부하는 데 시간을 거의 다 써서 창극단에 무슨 일이 있는지도 모르고 살았어요.”

▷여러 스승에게 배웠는데 도제식으로 가르치는 국악계에서 그게 어떻게 가능했나요.

“국립창극단이 단원의 자질을 높이려고 외부에서 인간문화재를 모셔다 가르쳤어요. 그런데 단체로 공부하니 정신적인 것까지 확실하게 배울 수 없어서 따로 선생님을 모시고 공부하게 된 거죠. 국악계의 동량을 키운다고 선생님들이 참아주신 건지도 모르겠어요. 한 번 방에 들어가면 안 나오고 지독하게 했거든요. 그땐 많이만 하면 좋은 줄 알고 하루 종일 소리 소리 질렀습니다. 차 안에서도 일하면서도 소리를 했으니까요. 그런 시기가 없었다면 지금 같은 소리의 바탕이 없었겠죠.”

▷득음이구나 싶었던 게 언제였습니까.

“제 성격이 외향적이지 않아서 남이 있는 데서는 소리를 힘껏 못 냈어요. 그런데 창극 연출을 했던 허규 선생님이 제 가슴에 불을 질렀어요. ‘안숙선 씨, (새벽별 보기 운동하는 북한처럼) 별 보기라도 하시오. 왜 남들은 잘 나는 상처도 안 나요?’ 하는 겁니다. 오기가 생겨서 더 소리 공부에 매진하니 그 소리가 나더라고요. 1980년대에 국립극장과 일본 NHK방송이 조선통신사 기념공연을 할 때 제가 심청을 맡았는데 허 선생님이 ‘안 선생, 지금의 이 목, 이 컨디션을 잘 유지해. 아주 잘 나온다’며 응어리를 풀어주셨지요. 그래서 독한 선생님이 필요해요.”

▷직접 가르쳐준 선생님들은 어땠습니까.

안숙선 명창이 작은 창극 ‘토끼타령’ 일본 공연을 앞두고 지난 15일 단원들의 연습을 지켜보고 있다.
안숙선 명창이 작은 창극 ‘토끼타령’ 일본 공연을 앞두고 지난 15일 단원들의 연습을 지켜보고 있다.
“만정(김소희), 향사(박귀희) 선생님은 제가 전국판소리명창대회에서 대통령상을 받자 ‘이제 공인이 됐으니 우리 뒤에 있지 말고 스스로 공부하고 관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상이 짐이 돼 더 공부를 하게 됐죠. 만정 선생님은 돌아가시기 며칠 전에 보내신 편지에서 ‘천 사람, 만 사람이 너의 소리가 좋다고 해도 정말 잘 알아듣는 귀가 있다면 그분 말을 잘 들어야 한다. 소리의 세계를 허술하게 생각하면 안 된다’고 당부하셨어요. 옛날엔 귀명창이 소리꾼보다 더 수준 높은 경우가 많았거든요.”

안 명창에게 위기는 없었을까. 60년 내내 판소리가 좋았을까. 그는 “1990년대 뜻밖의 위기가 있었다”고 했다. 전국판소리보존회가 주최한 대회에서였다. 사회자가 안 명창의 이름을 부르기에 먼저 나가서 소리를 했는데 하필이면 그가 제일 좋아하는 선배가 같은 곡을 부르게 돼 있었다. 주최 측은 판소리 유파별 발표가 같은 곡이라도 괜찮다고 했지만 그 선배는 안 명창을 크게 나무랐다. “이름이 좀 났다고 안하무인이 된 것이냐”면서. 안 명창은 롤모델처럼 믿고 따르던 선배요 선생님이라 충격이 오래갔다고 했다.

▷유파별로 소리의 차이가 큰가요.

안숙선 명창 "득음은 신기루 같아…판소리 달인도 연습 안하면 금세 잃죠"
“서편제와 동편제는 소리의 가는 길이 확연히 다릅니다. 곡의 표현이 달라요. 예를 들면 끝을 동그랗게 내리는 것과 확 쳐서 내리는 것, 끝을 졸라서 딱 떼버리는 것과 뒤로 늘어놓는 것, 극적인 면이 강한 것과 냉정하게 끊어버리는 것 등이 소릿길의 차이라고 할 수 있지요.”

▷판소리 다섯마당을 완창하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리나요.

“부르는 속도에 따라 다르지만 춘향가는 보통 6시간 반~7시간, 심청가는 6시간, 수궁가 적벽가 흥보가는 3시간~3시간 반 정도 걸리죠.”

▷가사를 어떻게 외웁니까.

“가사는 습관처럼 돼서 나와야지 다음 가사가 뭔지 생각해서는 부를 수 없어요. 가사가 머리를 안 거치고 바로 나와야 합니다. 가사에 신경을 쓰면 박자를 다 놓쳐요. 그래서 완창하려면 1~2년 전부터 하루 한 바탕 내지 이틀에 한 바탕을 불러서 눈을 감고도 줄줄줄 나오도록 합니다. 옛날 선생님들은 ‘소리를 입에 달아두소’라고 했어요. 많이 연습해 놓은 것은 지금도 줄줄 나오는데 덜한 것은 가사가 앞뒤로 왔다갔다 해요.”

▷그렇게 힘든데 판소리의 매력이 뭘까요.

“춘향의 정절, 심청의 효심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주제입니다. 사람 사는 이야기니까요. 판소리는 누구에게나 ‘나의 이야기’가 될 수 있어요. 그래서 공감대가 생기고 사람들을 울리고 웃깁니다. 그걸 음악으로 승화시킨 게 매력적이죠.”

안 명창은 국립국악원 스승의 당부대로 판소리 전통을 지키면서도 새로운 시대에 맞게 변용하는 일에도 적극적이다. 클래식, 힙합, 재즈 등 다른 장르와의 협연, 협업을 지속해왔다. 작은 창극, 소극장 공연 등으로 관객과의 거리 좁히기에도 열심이다.

▷연극인 윤석화 씨처럼 모노드라마를 하고 싶다고 하셨는데요.

“일반인들이 국악을 접할 기회가 너무 없습니다. 예전에는 명절이나 국경일에 그런 기회가 많았거든요. 만정 선생님은 오로지 판소리만 하라고 하셨지만 시대가 달라진 지금 장르를 뛰어넘어서 새로운 시도를 해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판소리는 원래 모노송이지만 모노드라마처럼 노래, 춤도 넣어서 잘 짜보면 어떨까 하는 거죠. 그래서 융합된 그 속에 판소리가 살아남고 다양하게 여러 곳에서 표현될 수 있다면 좋지요. 해마다 대학에서 쏟아지는 소리꾼들이 활동할 수 있는 영역도 넓혀줘야 하고요.”

▷작은 창극에 공을 들이는 것도 그런 까닭입니까.

“창극은 판소리만 할 때보다 등장인물의 공감대 형성이라는 측면에서 장점이 많습니다. 국악과 졸업생 중에 실력자가 많은데도 들어갈 데가 없어요. 국립창극단과 지방의 창극단 몇 개뿐이니까요. 시·군·구 단위로 국악단체를 만들어 우리 음악극을 한다면 국악의 저변이 넓어지고 자부심이 생기는 데다 일자리도 늘어나니 좋잖아요.”

▷출연진이 적으니 움직이기 편하겠습니다.

“작은 창극이 인기를 끌면 전국 순회공연이나 해외 공연도 할 수 있지요. 인원이 10명 미만으로 단출하니 세계 어느 곳이든 큰 돈을 들이지 않고도 갈 수 있어요. 오는 22일과 24일 일본 도쿄에서 공연하는 ‘토끼타령’은 작은 창극으로는 첫 해외공연인데, 이를 계기로 작은 창극이 많이 생겼으면 좋겠어요. 작은 창극은 한 사람이 다양한 역할을 하니 1인1역의 기존 공연보다 독특한 재미가 있을 겁니다.”

▷지난해 첫 단독 공연을 서울과 대전의 소극장에서 열었습니다.

“관객이 적은 소극장에서는 음향 효과를 사용하지 않고도 모두에게 소리를 전달할 수 있습니다. 고품질의 생생한 음악을 들려줄 수 있으니 관객에게 다가가 마음을 움직이기 쉽죠. 본래 판소리는 자연 소리 그대로가 가장 좋아요. 예전에 국극이 그랬듯이 안숙선단체, 누구 단체 해서 소극장 공연단체가 많이 늘어나면 좋겠어요. 처음엔 춘향전 심청전으로 시작해서 점차 레퍼토리를 늘려가면 됩니다.”

▷양악에 비해 국악은 접할 기회가 적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국악을 접해봐야 애든 어른이든 좋아하게 됩니다. 예전에는 국악이, 판소리가 생활 속에 있었는데 지금은 그게 안 돼요. 교육이 먼저 돼야 합니다. 유치원, 어린이집 등에서부터 꽹과리, 북, 장구 등을 하나씩 알게 하고 판소리든 민요든 성악도 가르쳐야 합니다. 단소, 대금 같은 악기도 접하면 좋지 않을까요. 그러면 우리 음악을 남의 것인 양 안 하지 않을까요. 언젠가 일본에서 TV를 보니 애니메이션의 여주인공이 악당을 물리치고 돌아와 찾아간 곳이 가부키 연습장이었어요. 그렇게 가부키를 아이들에게 알리는 거죠.”

▷판소리는 한자 때문에 내용이 쉽지 않고, 가사를 알아듣기도 어렵습니다.

“그래서 어린이가 부를 만한 판소리 음악이 뭐가 있을까 반성적 차원에서 살펴보고 있어요. 순우리말로 된 춘향전, 심청전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요. 그간에는 맥이 끊기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이제는 어릴 때부터 귀명창을 길러내야 한다고 생각해요. 어린이들이 쉽게 따라 부를 수 있는 판소리 한 대목을 만들 필요도 있고요. 사람들이 노래방에 많이 가는데 국악노래방을 만들면 어떨까요?”

안 명창의 고민이 깊어지는 모양이다. 소리꾼으로서의 개인적 과제 외에 국악계 어른으로서의 짐이 더해져서다. ‘생계형 국악인’들에게 희망도 만들어줘야 한다. 그는 “예전에는 내 소리에만 모든 걸 걸었지만 이제는 전체인 것들, 국악계의 고민과 발전 방향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2013년부터 국립국악원의 어린이창극 아카데미를 통해 아이들을 만나고, 국악아카데미 최고경영자(CEO) 과정에서 기업인을 가르치는 것도 그런 노력의 하나다.

다음주 일본 공연을 앞두고 지난 15일 국악원에서 연습을 마친 안 명창과 예술의전당 내 한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일어섰을 때였다. 몇 테이블 건너에 있던 고학찬 예술의전당 사장이 다가와 반갑게 인사를 건네더니 이렇게 말했다. “제가 안 선생님 팬입니다. 선생님한테 배운 ‘만고강산’ ‘사철가’는 다 부를 수 있어요.” 고 사장도 국악아카데미 CEO 과정에서 배우고 있는 안 명창의 제자였다.
안숙선 명창 "득음은 신기루 같아…판소리 달인도 연습 안하면 금세 잃죠"
첼리스트 정명화와 호흡 맞춰보니
"첼로와 판소리 찰떡궁합…밀고 당기는 게 닮아 놀랐죠"


“밀고 잡아 당기는 첼로 소리가 판소리와 너무나 비슷해서 놀랐어요. 밀고 당기고, 쳐내고, 튀어 올랐다가 떨어지곤 하는 첼로의 매력에 협연할 때마다 감탄하고 감동합니다.”

첼리스트 정명화(왼쪽)와 여러 차례 협연한 안숙선 명창의 소감이다. 안 명창은 현대자동차 정몽구재단이 주최하고 한국예술종합학교가 주관하는 ‘예술세상마을 프로젝트’에 정명화와 함께 3년째 참여해왔다. 이 프로젝트는 두 거장이 강원 평창군 계촌마을을 클래식마을로, 전북 남원시 비전마을과 전촌마을을 국악마을로 지정해 다양한 무대와 예술교육을 펼치는 사업이다. 두 사람은 지난해 계촌마을에서 열린 클래식거리축제에서 협연한 데 이어 16~18일 열리는 남원 동편제마을 국악거리축제의 폐막 공연(18일)에서 ‘판소리, 첼로, 피아노와 소리북을 위한 세 개의 사랑가’를 협연한다. 오는 8월엔 계촌마을 클래식축제에서도 만날 예정이다.

안 명창은 “처음엔 양악과 국악의 표현 방법이 달라 어려웠지만 서로를 배려하면서 연습하다 보니 역시 음악으로는 통하지 않는 곳이 없다는 걸 확인했다”고 설명했다. 두 사람은 한 번 시작하면 2시간 이상 연습한다. 안 명창은 “연습을 많이 하면서 서로 닮아가려고 노력했다”며 “정명화 선생이 판소리가 밀고 당기는 느낌을 첼로로 표현하시는데 역시 대가다운 세계가 있더라”고 설명했다.

정몽구재단의 예술세상마을 프로젝트에 대해서는 “너무나 의미가 있는 일이라 참여 제안을 받았을 때 생각할 것도 없이 승낙했다”고 했다. “음악은 인간들이 서로 사랑하고 위로하라고 신이 내려주신 것 같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그런 음악이 삶에서 멀어지고 사라질 위기라면 정말 문제지요. 정몽구재단이 전국의 작은 마을에서 클래식과 국악의 꽃을 계속 피워 나간다면 정말 멋진 일 아닐까요.”

서화동 문화선임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