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일본 해군 병사, 천황을 부정하다
“나는 스스로의 책임과 양심에 따라 국가를 결연히 거부한다. 조국애도 애국심도 이제는 지긋지긋하다.”

일본 해군에 자원 입대해 태평양 전쟁에 참전했던 와타나베 기요시(1925∼1981)가 1945년 9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쓴 일기를 묶은 《산산조각 난 신》의 한 대목이다. 한때 천황이 신성불가침한 존재라고 믿은 와타나베는 어떻게 무정부주의자가 했을 법한 말을 남겼을까.

와타나베는 천황에게 받은 은혜를 갚으려면 일본이 전쟁에서 이길 수 있도록 목숨을 바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종전 뒤에는 천황을 부정하는 것뿐만 아니라 일본이라는 국가마저 부정한다.

와타나베는 1977년 일본에서 출간돼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이 책에서 자신이 이런 심경 변화를 일으킨 이유를 자세히 풀어놓는다. 그는 자기 손으로 개전 명령에 서명해놓고 패전 뒤에는 태도를 바뀌 적장에게 예를 표하는 천황을 목도하며 혼란에 빠진다. 언론은 ‘성스러운 전쟁’을 부르짖으며 사람들을 전선으로 떠밀다가 패전 후에는 모든 것을 군국주의자 탓으로 돌렸다. 교사는 ‘천황은 사람의 모습을 한 신’이라고 가르쳐놓고 나중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당시의 교육을 부정했다.

이런 모습을 보며 분노하던 와타나베는 어느 순간 자기 책임도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책을 읽고 공부하며 자신의 눈으로 사회를 보는 안목을 기른다. 마침내 국가주의를 거부하고 스스로의 양심에 따라 행동할 줄 아는 인간으로 다시 태어난다. 군 복무 시절 받은 급료를 모두 천황에게 보내며 “나는 이제 당신에게 아무것도 빚진 게 없습니다”라고 선언하는 그의 모습이 묵직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장성주 옮김, 글항아리, 452쪽, 1만8000원)

양병훈 기자 h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