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갤러리의 ‘한국 현대미술 거장들의 판화전’에 나온 천경자 화백의 1973년작 ‘길례언니’.
한경갤러리의 ‘한국 현대미술 거장들의 판화전’에 나온 천경자 화백의 1973년작 ‘길례언니’.
금세 울음이 터질 것만 같은 촉촉한 눈망울과 묘한 눈빛, 빨간 입술에는 외로움과 고독이 물결처럼 번진다. 머리에는 꽃장식이 화려하기 그지없다. 입가에 감도는 옅은 미소는 애써 고독감을 잊고자 하는 여인의 마음을 대변해준다. 고독감에 싸인 한 여인의 침묵을 담아낸 고(故) 천경자 화백의 1974년 작 ‘고(孤)’이다. 소설가 김훈 씨는 이 작품에 대해 “신생하는 것들에 대한 아름다움”이라는 감상평을 내놓기도 했다.

유영국 화백의 ‘보라산’
유영국 화백의 ‘보라산’
천 화백을 비롯해 김기창 이대원 권옥연 유영국 박고석 정상화 김창열 이우환 이왈종 황규백 오치균 등 한국 화단을 빛낸 거장들의 다양한 판화 작품을 한곳에서 감상할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됐다. 서울 중림동 한국경제신문사 1층 한경갤러리가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1일 개막해 오는 18일까지 펼치는 ‘한국 현대미술 거장들의 판화전’을 통해서다.

‘거실을 갤러리로’를 부제로 붙인 이번 전시에는 작가들이 생전에 직접 제작에 참여해 친필 사인한 ‘오리지널 판화’에서부터 작가 사후에 유족이나 재단이 만든 ‘사후 판화’, 원화를 복제한 후 사인을 한 ‘오프셋 판화’에 이르기까지 40여점이 걸렸다. 국내외 미술시장에서 평가받는 유명 화가들의 다양한 형태의 판화를 보면서 작품 시장성과 원본·사본의 관계 등을 조명해볼 수 있다. 판매가는 점당 25만원부터 350만원대까지 다양하다.

이왈종 화백의 ‘제주생활의 중도’
이왈종 화백의 ‘제주생활의 중도’
가족들의 감성 에너지를 북돋워 주기 위해 거실을 비롯해 안방, 화장실, 부엌, 서재 등에 어울리는 그림을 큐레이터가 추천해 준다. 큰돈 들이지 않고 좋은 작품을 구입할 수 있는 기회다.

출품작은 한국 근현대미술 거장들의 미학적 감성을 다채롭게 보여준다. 천 화백의 작품은 ‘고’ 외에도 여러 점을 판화로 만날 수 있다. 유년 시절 고향 언니를 떠올리며 그린 ‘길례언니’를 비롯해 ‘황금의 비’ ‘팬지’ ‘사월’ ‘우수의 티나’ 등 몽환적인 여인이 등장하는 작품에서는 화려한 색채로 버무린 고독과 애틋한 사랑을 함께 느낄 수 있다.

한평생 ‘꽃비’처럼 살다 간 한국 화단의 거목 이대원의 판화 작품도 관람객을 반긴다. 그는 1950~1960년대 한국 화단에 일던 미니멀리즘 경향의 추상화 바람을 뒤로하고 자연 풍경을 그리는 구상회화를 고집하며 자신만의 조형세계를 지켰다. 이번 전시에는 원색의 미감으로 들녘 풍경을 재해석한 ‘농원’과 ‘사과나무’ ‘연못’ ‘개나리’ 등이 걸렸다.

80세를 앞두고 여전히 설악산 작업실에서 하루 10시간 이상 화폭과 마주하는 김종학 화백의 1980년대 작품 ‘설악산’ 시리즈도 나와 있다. 설악산의 다양한 이미지를 마음속에 담아뒀다가 작업실에서 하나하나 꺼내 그린 작품으로 꿈틀거리는 생명력과 풋풋한 상상력이 돋보인다.

현대판 풍속화로 유명한 이왈종 화백의 작품 ‘제주생활의 중도’ 시리즈도 눈길을 붙잡는다. 사람과 자연이 하나가 돼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중도(中道)의 경지를 화폭에 쏟아낸 작품들이 흥미롭다. ‘산의 작가’로 유명한 박고석과 유영국의 작품도 판화로 비교하며 감상할 수 있다. 박 화백의 ‘도봉산’ 시리즈가 격정적인 붓 터치에 힘입어 토속적 생명력을 뿜어낸다면, 유 화백의 산에서는 색면 추상화된 이미지로 숭고미를 읽을 수 있다.

강력한 필선과 대담한 구도 안에 인간적 우수와 해학을 담은 김기창의 녹색산수, 말없이 어딘가를 응시하는 여인을 잡아낸 권옥연의 작품, 단색화 거장 정상화와 이우환의 작품, 영롱한 빛을 발하는 물방울을 극사실적으로 잡아낸 김창열의 그림, 유년 시절 고향 땅에 대한 그리움과 추억을 감나무로 은유한 오치균의 작품도 출품됐다.

인재희 한경갤러리 큐레이터는 “판화는 희소성이라는 점에서 저평가됐지만 덜 부담스러운 가격으로 거장의 작품을 소장할 수 있어 일반인의 관심이 높아지는 추세”라며 “직장인, 주부 등이 판화를 구입해 집안을 꾸밀 수 있도록 기획했다”고 말했다.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