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부터 윤명로 화백, 김구림 화백, 석철주 화백, 강형구 화백
왼쪽부터 윤명로 화백, 김구림 화백, 석철주 화백, 강형구 화백
미술가들에게 작업실(아틀리에)은 모든 창작이 시작되는 비밀스런 공간인 동시에 한 인간의 열정과 욕망, 자유와 고독을 품은 숭고한 장소다. 유명 화가들이 자신의 예술적 영감을 농축하고 있는 본거지인 작업장을 소재로 명작을 내놓은 이유가 여기 있다. 프랑스 화가 구스타브 쿠르베는 자신의 아틀리에를 소재로 ‘화가의 작업실’을 그려 주목받았다. 인상파 화가 에두아르 마네는 동료작가 모네의 한적한 강변 위 ‘보트 작업실’, 앙리 마티스는 ‘아틀리에 4부작’을 그려 명작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화가들의 화실을 전시장으로 옮겨 예술적 영감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유추해 보고, 작품도 감상할 수 있는 이색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지난 6일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한가람디자인미술관에서 문을 연 ‘아틀리에 스토리’전이다. 오는 30일까지 국내 최정상급 작가 14명의 작품과 작품이 탄생되는 작가의 작업실을 공개한다.
구자승 화백이 서울 예술의전당 한가람디자인미술관 전시장으로 옮겨온 작업실을 설명하고 있다.
구자승 화백이 서울 예술의전당 한가람디자인미술관 전시장으로 옮겨온 작업실을 설명하고 있다.
‘정물화의 대가’ 구자승 화백을 비롯해 윤명로, 김구림, 석철주, 강형구, 김강용, 전명자, 박선기, 권오상, 김남표, 이이남, 홍경희 등이 참가해 전시장을 작업실로 꾸미고 최근작을 함께 보여준다.

구자승 화백(71)은 충북 청주 장호원에 있는 아틀리에를 ‘영혼의 저장소’라고 소개했다. 그는 캔버스 위에 비워진 술병을 비롯해 보자기, 오랜 유물 같은 색바랜 주전자, 체리토마토, 레몬, 계란 등 무생물의 영혼을 생생한 에너지로 치환한 결과를 작품으로 보여준다. 그의 화실에는 오브제들의 율동을 잡아내는 데 쓰는 화필과 각양각색의 물감이 담긴 통만 100여개가 넘는다. 구 화백은 “있는 그대로의 사물을 옮기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꿈틀거리는 영혼과 호흡을 그리고자 했다”고 말했다.

실제 그의 작품 세계는 깊은 골짜기에서 쉼 없이 흐르는 물줄기처럼 고여 있지 않다. 색채가 흐르는 화면은 청명한 호흡(소리)을 남긴다. 그 호흡을 화폭 안에 담아내는 화가의 손끝은 쉴 틈이 없다. 미묘하게 달라지는 사물의 숨소리를 화폭 안에 옮기는 데 매일 10시간 이상 작업에 매달린다. 구 화백의 작품이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분명 작가 내면의 울림과 치밀하고 정교한 기교 때문이다.

서울 평창동 작업실을 그대로 옮겨 놓은 ‘추상화의 거장’ 윤명로 화백(81)은 화실을 예술적 영감이 고농도로 농축된 ‘미답(未踏)의 세계’라고 했다. 아무도 밟지 않은 고원에서 새로운 예술에 수렴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작품들은 고정된 이미지를 제공하고 있지 않지만 보는 시점에 따라 색깔이 변화하면서 다양한 현상으로 다가온다. ‘창조란 일상생활에서 끊임없이 이뤄지는 과정인데 몸을 도구 삼아 거칠게 몰아붙이는 폭풍 같은 것’이란 그의 말이 실감난다.

‘영원한 아방가르드’로 불리는 김구림 화백(81)은 경기 양주 작업실을 ‘수행의 공간’이라 했다. 현대적 한국화의 개척자 석철주 화백(67)은 작업 공간을 ‘몽중몽(夢中夢)’이라고 소개했다

이 밖에 세계적 미술품 경매회사 크리스티에서 주목받는 극사실주의 화가 강형구, 제2의 백남준이라 불리며 미디어아트의 세계적 작가로 인정받는 이이남, 서울과 파리를 오가며 활동하는 전명자 화백, 사진 조각가로 유명한 권오상 등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작가들의 작품과 작업실도 눈길을 끈다. 미술평론가 정준모 씨는 “화가들에게 작업실은 외로움과 사투하는 공간인 동시에 창작에 몰입하는 희열의 장소”라며 “그래서인지 그림에 꿈과 영혼을 담아내려는 작가들의 의지는 흡사 수도승의 모습에 가깝다”고 말했다. (02)2146-0888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