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조선 국왕 장가보내기'

조선 영조 25년(1749)에 편찬된 '국혼정례'(國婚定例)에는 왕실의 혼인인 국혼에 드는 예산이 상세하게 정리돼 있다.

결혼에 관한 일을 맡기 위해 임시로 설치되는 기구인 가례도감은 호조로부터 은돈 500냥, 전문(錢文, 돈) 75관, 명주로 짠 피륙 2동, 쌀 100석 등을 받았고, 병조로부터 전문 75관과 무명실로 짠 피륙 15동을 걷었다.

호조와 병조는 가례도감 외에도 왕실 재정을 관리하던 관아인 내수사(內需司)에 별도의 비용을 전달해야 했다.

임민혁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전임연구원은 신간 '조선 국왕 장가보내기'(글항아리 펴냄)에서 1746년 간행된 법전인 '속대전'을 근거로 물품의 가격을 현재 가치로 계산해 호조와 병조가 가례도감에 낸 돈은 2억2천625만원, 내수사에 지불한 금액은 4억5천117만원이라고 주장한다.

국혼에 들어간 예산이 약 6억8천만원이라는 것이다.

그는 "호조에서 양 기관에 보낸 예산을 쌀 1천800석으로 어림잡으면 호조가 1년간 운용하는 예산의 약 2%에 해당한다"며 "영조 40년(1764)에는 임금이 왕자녀의 가례가 겹치자 비용을 줄이기 위해 지나친 사치를 없애도록 했다"고 지적한다.

저자는 이처럼 국가의 대사였던 국왕의 혼인을 왕비 간택부터 결혼식의 동뢰연(同牢宴, 신랑과 신부가 서로 절을 하고 술잔을 나누는 의례)까지 집중적으로 살펴본다.

조선시대 국왕의 결혼 방식은 매우 권위적이었다.

왕은 중매쟁이로부터 부인을 소개받는 것이 아니라 전국에 금혼령을 내린 뒤 각지에서 왕실이 제시한 규정에 맞는 처녀의 이름을 쓴 처녀단자를 제출하도록 했다.

양반들은 딸이 궁으로 들어가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아 다양한 방법으로 처녀단자 제출을 피했다.

이에 대해 저자는 "간택 참여에 생각보다 큰 비용이 소요됐고, 궁궐에 평생 갇혀 지내야 하는 삶이 녹록하지만은 않았다"고 강조한다.

신부 후보 중에서 적임자를 찾는 간택은 세 차례에 걸쳐 이뤄졌다.

초간택에서 5명 내외를 남겼고, 재간택에서는 3명 내외로 추렸다.

간택 처녀들은 왕실의 특별한 손님이었기 때문에 낙점받지 못하더라도 푸짐한 선물을 받아 귀가했다.

최종적으로 간택된 여성은 별궁 생활을 거쳐 왕과 혼례를 올렸다.

영조는 1759년 정순왕후와 결혼할 때 병사 400명을 동원해 장엄한 행렬을 펼치면서 51살 어린 계비를 맞았다.

왕실의 결혼 과정을 조명한 저자는 후궁을 단순한 첩이 아니라 '왕비가 될 수 있는 예비 존재'로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중종의 첫 번째 계비인 장경왕후는 정비인 단경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후궁에서 비가 됐다.

저자는 "종2품의 후궁인 숙의 중 공식적인 절차를 거쳐 책봉된 여성은 국왕의 또 다른 부인이라고 할 수 있었다"면서 "일률적으로 후궁을 첩이라 칭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한다.

336쪽. 2만원.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psh59@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