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택, 뉴욕 전시 사실상 완판…김기린 미국 데뷔 성공
단색화 거장 정상화, 5월 런던 전시 앞두고 주문 이어져
박서보 화백은 해외서 팔린 작품값 40억을 재단에 기부
80대 노화가들의 뚝심…뉴욕·런던을 홀리다

“미국 메이저 화랑인 리만머핀갤러리의 레이첼 리만 대표가 한 번의 전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꾸준히 함께하고 싶다고 했을 때 무척 감동했습니다. 제 작품 의도와 감성을 아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어요. 특별한 설명 없이도 내용을 알아주는 사람은 굉장히 드물거든요.”

젊은 시절부터 꿈꿔온 미국에서의 첫 개인전을 지난 25일 끝낸 모노크롬(단색화) 선구자 김기린 화백(81)은 “이번 뉴욕 전시가 앞으로 작품 활동에 큰 힘이 될 것”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김 화백을 비롯해 박서보, 정상화, 이승택 등 80대 노화가들이 미국 유럽 아시아 등지의 미술 애호가를 사로잡으며 대박 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국제적 인맥이 없는 가운데서도 독창적인 작품성만으로 세계적인 작가들과 경쟁하며 미술 한류를 개척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미국 뉴욕 맨해튼 레비고비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이승택 화백의 개인전을 찾은 뉴요커들.

미국 뉴욕 맨해튼 레비고비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이승택 화백의 개인전을 찾은 뉴요커들.

한국 행위미술 뉴욕서 인기 행진

실험미술 1세대 대표 작가인 이승택 화백(86)은 뉴욕 화단에서 한국 행위미술의 우수성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지난 14일 미국 뉴욕 맨해튼 레비고비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시작한 그는 전시 개막 10일 만에 퍼포먼스 사진, 설치, 조각 등 출품작 37점(350만~400만달러) 가운데 비매품 10점을 제외하고 모두 팔아 단번에 280만달러(약 30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예술 수준이 높은 뉴욕 컬렉터들이 한국의 전위적·실험적 작품에 열광한 게 이례적이다.

1958년 홍익대 조각과를 졸업한 이 화백은 특정한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물, 불, 바람, 연기 등 시각화하기 어려운 재료의 실험을 지속하며 한국 미술사에 다양성을 부여하는 작업을 선보여왔다. 2009년 백남준아트센터 국제예술상을 수상하며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 등 세계적인 큐레이터에게 극찬을 받았다.

김기린 화백도 뉴욕 리만머핀갤러리의 개인전에 출품한 1960~1970년대 초기 작품과 2000년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시리즈 등 17점(250만달러 상당) 중 10여점(약 15억원)을 팔아 미국 데뷔에 성공했다. 성장이 기대되고 작품성이 두드러진 김 화백의 회화를 뉴욕 컬렉터들이 눈여겨보기 시작했다는 게 현지 미술계의 평가다.

특히 제프 쿤스, 아니시 카푸어, 류웨이, 빌리 차일디시, 트레이시 에민 등 세계적인 작가를 발굴해온 리만 대표가 그의 작품 판매에 직접 나서 화제가 됐다. 한국외국어대 불어과를 졸업하고 1961년부터 프랑스 파리 다종대에서 미술사를 공부한 김 화백은 미술 인생 50여년 동안 모노크롬이라는 한우물을 파왔다.

박서보·정상화, 런던 사로잡다

단색화의 선두주자 박서보 화백(86)도 또 한 번 큰일을 해냈다. 지난 12일 끝난 런던 화이트큐브의 두 번째 개인전에 출품한 대작 컬러 ‘묘법’ 시리즈 15점(약 40억원) 중 절반이 팔린 것. 박 화백은 지난해 전시에서도 1967~1981년작 ‘묘법’ 시리즈 17점을 판매해 50억~60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박 화백은 “최근 런던, 홍콩 등 해외 전시에서 팔린 작품값 40억원을 서보미술문화재단에 기부해 50대 이상 중견작가를 지원할 계획”이라며 “진정한 글로벌 작가로 거듭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뉴욕 도미니크레비갤러리와 그린 나프탈리갤러리가 공동으로 펼친 개인전에서 작품 대부분이 팔려 화제를 모은 정상화 화백(85)도 오는 5월 런던 레비고비갤러리 개인전을 앞두고 예약 주문이 이어지고 있다.

광복과 6·25전쟁, 군사독재와 민주화, 디지털 시대를 겪어온 이들은 한국의 문화적 토양을 바탕으로 범세계적인 주제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풀어냈다. 동·서양 정신의 융합과 평생 붓을 놓지 않은 프로의식은 미국과 유럽 컬렉터들의 까다로운 입맛을 충족시킨 요인으로 작용했다.

도형태 갤러리 현대 대표는 “정국 혼란과 시장 침체로 국내 판로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노(老)화가들이 그동안 쌓아올린 인지도를 바탕으로 해외시장에서 저력을 보여주기 시작했다”며 “한국미술의 가장 큰 강점인 ‘손맛’과 열정이 해외시장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이라고 분석했다.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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