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 화가 이상남 씨가 PKM갤러리에 전시된 자신의 작품 ‘알고리즘’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재미 화가 이상남 씨가 PKM갤러리에 전시된 자신의 작품 ‘알고리즘’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재미 화가 이상남 씨(64)는 홍익대 미대를 졸업하고 28세였던 1981년 뉴욕으로 떠났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뉴욕은 고층 빌딩 사이로 현대적 이미지가 넘쳐나는 최첨단 문명지대였다. 여기서 그는 눈에 보이는 것을 원과 선으로 압축해 화폭에 담았다. 첨단 문명이 만들어낸 뉴욕의 시공간을 건축적 회화로 풀어낸 ‘알고리즘(연산법)’ 시리즈다.

서울 삼청동 PKM갤러리에서 다음달 4일까지 열리는 ‘네 번 접은 풍경’전은 30여년간 뉴욕에서 활동해 온 이씨가 풀어낸 알고리즘에 관한 중간 보고서다. 이씨는 그동안 뉴욕의 다채로운 풍경과 이미지를 원과 선, 색으로 축조하는 새로운 미학 세계를 선보이며 세계 미술계의 주목을 받았다. 2006년 서울 역삼동 KB손해보험 본사 사옥에 벽화 형태의 초대형 추상화를 선보였고, 경기도미술관(2010), 폴란드 제2 도시 포즈난의 신(新)공항 로비(2012), 경남 사천 KB손해보험 연수원 등에도 잇달아 작품을 설치해 화제를 모았다.

서울에서 5년 만에 연 이번 전시에는 현대문명의 중심지 뉴욕의 시공간을 선과 면, 색으로 압축해 자신만의 이미지로 만들어낸 1980년 초기작부터 색면을 좀 더 부각한 최근작까지 50점을 내걸었다. 작가는 “디지털 시대의 현대인은 어쩌면 이미지 홍수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살고 있다”며 “현대인이 첨단문명 속에서 살아가는 일상을 선율적이고 회화적인 건축처럼 보여줄 수 없을까 고민한 결과물”이라고 설명했다.

그의 초기 작품은 수학자나 건축가의 작업 노트처럼 보인다. 아크릴 물감으로 캔버스를 칠하고 사포로 갈아내기를 50~100차례 반복해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물감의 결이 중첩된 기하학적 이미지들은 ‘1㎜의 전쟁’이라고 표현할 만큼 정교하고 섬세하다.

그의 작업은 스스로의 체험과 사유에서 비롯된다. 뉴욕 도심을 이리저리 누비기를 즐기는 그는 여러 장소에서 체험한 풍경과 사물을 유기적으로 연결한다. 몬드리안 등을 연상케 하는 기하학적 패턴에 자신의 체험과 감성을 절묘하게 불어넣는다. 흑백 화면의 매끄러움은 사람의 시각을 시시각각 건드리며 마음속으로 스르르 밀고 들어온다.

1980~1990년대 초기 작품이 흑백의 기하학적 형태라면 최근 작품은 중첩된 이미지를 건축적으로 축조한 형태의 추상 작업이다. 복제되고 소비되는 인공적인 이미지를 껌을 씹듯 재구성해 형이상학적 미감을 연출했다. 기하학적인 무늬와 알록달록한 색상이 묘한 조화를 이룬 화면은 팔딱팔딱 맥박이 뛰는 듯 생동감이 넘친다. 작가는 “클래식 음악처럼 멀리멀리 퍼져가는 문명의 선율을 즐기며 껌을 씹듯 가볍게 눈으로 씹어보라”고 말한다.

이씨가 그림을 통해 전하려는 건 뭘까. 그는 “정해진 해석이나 의미는 없다”면서 “작품과 관람객의 퍼포먼스를 유도해 미학적 아이러니를 공유하고 생산하는 과정”이라고 설명했다.(02)734-9267

김경갑 기자 kkk10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