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라희 리움 관장 전격 사퇴…미술계 '술렁'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부인인 홍라희 삼성미술관 리움 관장(72·사진)이 6일 사퇴했다. 삼성문화재단은 이날 “홍 관장이 일신상의 이유로 리움과 호암미술관 관장직을 사퇴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미술계 영향력 1위 인사인 홍 관장의 전격 사퇴는 아들인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구속과 미래전략실 해체에 따른 것으로 관측된다. 서울대 미대 출신인 홍 관장은 1995년부터 경기 용인 호암미술관 관장을 맡았고 2004년부터는 리움 관장도 함께 맡아왔다. 재력과 인맥, 미술품을 보는 안목까지 갖춰 ‘미술계의 큰손’으로 꼽혀온 그의 사퇴는 국내 미술계에 적잖은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국내 미술계 영향력 1위

2004년 개관한 리움은 근·현대 미술과 고미술을 아우르는 국내 최고 사립미술관이다. 개관 당시 소장품이 1만5000점을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홍 관장은 막강한 컬렉팅 파워와 함께 최신 트렌드를 이끄는 기획전 등으로 미술계에서 최고의 영향력을 발휘했다.

리움은 문화재단과 미술관을 통해 미니멀리즘전(1990년)을 비롯해 이우환의 뉴욕 구겐하임미술관 전시(2011년) 등을 이끌었다. 2015년엔 국제미술시장에 한국 단색화를 알렸다. 젊은 유망 작가를 발굴하는 ‘아트스펙트럼’과 파리 레지던스 프로그램,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등을 지원하며 미술계 발전에 기여했다. 매슈 바니, 마크 로스코, 앤디 워홀에 이르기까지 현대 미술 거장들의 개인전을 잇달아 열어 일반 대중과 현대미술의 가교 역할을 했다. 미술잡지 ‘아트프라이스’ 등이 2005년 이후 그를 ‘한국 미술계를 움직이는 대표적 인물’ 1위로 꼽아온 이유다.

홍 관장은 2008년 6월 삼성 비자금 특검 당시 이 회장의 퇴진과 함께 리움 관장직에서 물러났지만 2011년 복귀해 한국 미술 발전에 힘을 보태왔다. 정준모 미술평론가는 “그동안 리움 전시들은 여느 국공립 미술관보다 뛰어났다”며 “대중의 문화 향유를 위한 리움의 기여는 인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미술사업 축소…홍라영 부관장 체제로

홍 관장의 사퇴는 작년부터 예견됐다. 삼성이 지난해 말부터 대표적 문화사업이던 미술 관련 사업을 대폭 정리하고 전시계획을 축소했기 때문이다. 서울 태평로의 삼성생명 본사 사옥을 부영에 매각하면서 건물 앞에 있던 플라토미술관(옛 로댕갤러리)을 전격 폐관했다. 또 리움 부설 삼성어린이박물관 인력을 내보내고 별도 법인화하는 등 몸집을 줄였다. 현재 삼성이 운영하는 미술관은 리움과 호암미술관 두 곳으로 줄었다.

올해 전시 계획도 국내외 유망한 작가를 발굴하는 개인전이나 유명 해외미술가 초대전은 없고, 김환기 회고전(4월)과 서예전(9월)만 잡아놨다. 삼성문화재단에서 일했던 한 인사는 “사업적으로 돈이 안 되는 미술 분야부터 먼저 정리하는 과정에서 나온 결정”이라며 “2008년 삼성 비자금 특검 이후 ‘개점휴업’ 상태와 비슷하다”고 전했다.

이런 분위기에다 아들인 이 부회장까지 구속되자 홍 관장이 사퇴 결심을 굳힌 것으로 미술계에선 보고 있다. 홍 관장은 지난달 17일 이 부회장이 구속되자 “참담한 심정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다”는 뜻을 주위에 밝혀온 것으로 전해졌다.

후임은 미정이다. 당분간은 홍 관장의 동생인 홍라영 총괄부관장 체제로 운영될 전망이다. 일각에선 외부 인사를 관장으로 위촉할 것으로 보고 있으나 가능성은 크지 않다.

서울 인사동 등 화랑가에서는 홍 관장 사퇴로 투자 심리가 위축될까 우려하고 있다. 세계 미술시장의 ‘큰손’인 홍 관장이 더 이상 미술품 컬렉션에 나서지 않을 경우 국내 시장의 불확실성이 커질 수 있어서다. 박우홍 동산방화랑 대표는 “경기 침체로 화랑들이 전시 성수기인 봄 시즌인데도 기획전 하나 제대로 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라며 “홍 관장의 사퇴로 시장 분위기는 더욱 악화돨 것”이라고 우려했다.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