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직하려고 초능력 써요"…갑갑한 시대를 '사이다  판타지'로 뻥~
초반엔 ‘3포 세대’였다. 20대가 극심한 취업난에 연애와 결혼, 출산을 미룬다는 신조어였다. 청년 실업문제가 심각해지자 앞에 붙는 숫자가 점점 늘었다. 내 집 마련과 인간관계도 포기했다는 ‘5포 세대’가 나오더니, 거기에다 꿈도 희망도 버렸다는 ‘7포’를 거쳐 이젠 무한 확장이 가능한 ‘N포 세대’라는 말까지 나왔다. 요즘 TV 드라마도 이런 변화를 보여준다. 점점 어려워지는 현실에 놓인 청춘들의 갑갑함이 반영된 듯 드라마 내용이 바뀌고 있다. 취업준비생(취준생)과 공무원 시험 준비생(공시생)을 다룬 드라마들이 그렇다.

지난해부터 취준생과 공시생을 주요 인물로 다룬 드라마가 유독 많았다. 서울 노량진 학원가에 갓 입성한 무명강사와 공시생들의 이야기를 다룬 tvN ‘혼술남녀’. 각각 9급 공무원 시험과 임용고시에 10년째 도전 중인 백수 커플을 보여준 SBS ‘우리 갑순이’, 취업 스트레스로 주인공이 탈모 증세까지 겪는 SBS ‘미녀 공심이’,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다 간신히 취업한 20대 남성이 등장한 KBS ‘월계수 양복점 신사들’ 등이다. 미래를 위해 노력하는 20~30대의 일상을 풀어냈다. 대부분 결말에 가선 주인공의 인생이 잘 풀리는 드라마적 판타지를 집어넣었지만 전반적으로는 현실적인 묘사에 치중했다.

올해는 다르다. 주인공의 처지는 예전과 비슷하지만 인물 설정부터 판타지적 특성이 보인다. MBC의 ‘생동성 연애’와 JTBC의 ‘힘쎈여자 도봉순’은 초인적인 능력을 지닌 취준생이 주인공이다. MBC ‘자체발광 오피스’의 취준생은 시한부 선고를 받고 난 뒤 “이제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눈치 볼 것 없다”며 면접관을 대한다.

지난 2일 종영한 ‘생동성 연애’의 주인공 소인성(윤시윤 분)은 5년차 경찰 공무원 시험 준비생이다. 1년에 두 번 있는 시험에서 지난 4년간 여덟 번 떨어졌다. 임용고시를 준비하는 여자친구에게는 “한심한 놈”이라는 소리와 함께 차이고, 지내던 고시원에선 돈이 떨어져 쫓겨났다. 소인성은 거금을 준다는 얘기에 제약회사에서 복제약 효과를 알아보는 생동성 시험 아르바이트에 참가하고, 신약의 부작용으로 초능력을 얻는다. 운동신경과 암기력이 엄청나게 좋아진 것. 소인성은 새로운 능력으로 “지긋지긋한 노량진에서 벗어날 것”이라며 시험에 합격하길 꿈꾼다.

지난달 24일부터 방영 중인 ‘힘쎈여자 도봉순’은 27세 고졸 취준생 도봉순(박보영 분)의 이야기다. 맨손으로 달리는 버스를 잡아 세울 정도로 타고난 힘이 세지만 취업시장에선 스펙이 좋지 않은 탓에 매번 서류 전형에서 탈락한다. 이력서와 자기소개서 작성에 진력이 난 도봉순은 우연히 용역 깡패들을 맞닥뜨려 그들을 제압하고, 이를 눈여겨본 게임회사 대표 안민혁(박형식 분)의 개인 경호원으로 발탁된다. “경호를 잘 해내면 게임 기획개발팀에서 일할 기회를 달라”는 제안과 함께다.

오는 15일 방영을 시작하는 ‘자체발광 오피스’에도 취준생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28세 은호원(고아성 분)은 5년째 취준생이다. 없는 살림에 대학을 다니던 중 고깃집과 백화점, 편의점 등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이렇다 할 스펙을 쌓지 못했다. 100번째 응시한 입사시험에서 떨어진 뒤 은호원은 취중에 우연한 사고를 겪어 응급실에 가고, 6개월의 시한부 삶을 선고받는다. “이젠 눈치 보지 않고 할 말 하겠다”는 그는 101번째 입사시험에서 면접관이 지원 동기를 묻자 이렇게 답한다. “지원 동기? 이런 것 좀 시키지 마세요. 먹고살려고 지원했습니다. 예?”

이 주인공들은 독특한 능력이나 처지에도 평범한 삶을 살아간다. 초인적인 능력을 지녔다 해도 거창한 영웅을 꿈꾸지 않는다. 머리가 좋아진 소인성은 부모의 돈 걱정을 덜어주기 위해 한 차례 퀴즈쇼에 나가 상금을 타오고, 이후엔 지금껏 준비하던 시험 합격을 바란다. 도봉순의 꿈은 게임 기획자다. 자신처럼 힘이 센 여전사가 많은 가상 세상을 만들고 싶어서다. 은호원은 6개월 남은 삶 동안 지난 5년간 꿈꾸던 계약직 신입사원으로 살기를 택한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취업난을 배경으로 취준생과 공시생이 나오는 드라마가 많아지면서 이들의 삶을 표현하는 방식이 다양해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초능력이 있는 취준생 주인공들은 각자 능력이 있지만 현실적인 제약에 아직 능력을 못 펼치고 있다고 생각하는 젊은이들의 답답함을 반영한다”며 “지난한 취업과정을 겪었거나 겪고 있는 20~30대에게 공감과 카타르시스를 주는 설정”이라고 말했다.

선한결 기자 alway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