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부터 군사정권까지 일그러진 현대사를 되묻다
“난 벌써부터 포기했어요. 포기하고 절망해버리니까 차라리 마음 편해요. 이 나라에는 인권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아요.”

나이 든 직업여성 목화가 대통령 암살 음모 주모자이자 간첩으로 지명수배된 서문도에게 하는 말이다. 목화는 빚으로 포주에게 묶여 착취당하지만 그렇다고 경찰에 신고할 수도 없다. 포주와 경찰이 한통속이기 때문이다. 정부는 “남성들의 욕구 해소를 위해 사창가가 필요하다”는 논리로 이런 불법적인 착취를 수수방관하고 있다. 서문도는 목화의 처지를 안타깝게 여기지만 경찰에 쫓겨 다니는 자신의 처지도 그보다 나을 건 없다.

소설가 김성종 씨가 장편소설 《계엄령의 밤》(새움)으로 돌아왔다. 6·25전쟁부터 1980년 군사정권까지 30년간을 다룬 작품으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일그러지고 바닥으로 내려앉는 인간 군상을 그렸다. 그동안 추리소설을 주로 써온 김씨가 한국 현대사를 정면으로 다룬 작품을 낸 건 드라마로 만들어져 온 국민의 사랑을 받은 《여명의 눈동자》 이후 40년 만이다.

쿠데타로 정권을 탈취한 대통령 M은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을 죽이고 원성이 두려운 나머지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한다. 주인공 서문도는 대통령 암살 사건에 가담했다가 경찰에게 쫓기는 신세가 된다. 도망을 다니던 어느 늦은 밤 뒷골목에서 우연히 목화를 만나 하룻밤을 보낸 서문도는 더 이상의 도피 생활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일본으로 밀항을 결심한다. 일본에서 뒤늦게 목화의 비밀을 알게 된 그는 다시 귀국해 목화를 찾는다.

김씨는 “생각하기도 싫은, 너무 오래돼 곰팡이까지 낀 그것을 햇볕에 꺼내는 일이 지금까지 너무도 부족했음을 절감해 이번 작품을 쓰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어 “계엄 하의 그 살벌한 상황에서 벌어지는 인간들의 절망적인 몸부림과 저항을 그린 작품이 별로 없는 게 한국문학의 현실”이라며 “이 작품이 조그만 불씨가 돼 이제라도 계속 말썽을 피우는 작품이 쏟아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양병훈 기자 h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