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길영 씨의 도자 아트 ‘MAN’.
정길영 씨의 도자 아트 ‘MAN’.
“흙을 만지고 불과 씨름한 지 벌써 2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하지만 도예계 현실은 예나 지금이나 어렵기는 별반 다를 게 없어요. 오히려 땅 밑으로 더 가라앉은 느낌이죠. 그럴수록 도예의 가능성을 탐구하며 더욱 철저히 회화, 조각, 설치, 영상미학 같은 현대적 조형성과의 접목을 꾀했어요.”

전통 도예와 현대미술을 접목해 순수미술의 영역을 넓히고 있는 정길영 씨(53)의 말이다. 서울 신문로 갤러리 마리에서 지난 20일 시작한 정씨의 개인전은 도예의 새로운 가능성을 다채롭게 보여주는 자리다. 전시회 주제는 ‘내 삶의 여정’. 청화 도판에 그린 풍경화를 비롯해 자신의 일상을 묘사한 생활도자기, 도자 조각, 영상 작업 등 근작 100여점을 풀어놨다. 주변에서 일상적으로 볼 수 있는 풍경과 현대인의 삶과 이야기를 시각화한 작품들이다.

영남대 서양화과와 대학원을 졸업한 정씨는 2011년 초 중국 징더전(景德鎭)으로 건너가 흙과 불의 매력에 빠져 도예와 현대미술을 결합한 실험적인 ‘도자 아트’를 시도하고 있다. 한때 세계적 비디오아티스트 백남준과 함께 그룹전에 참가하기도 한 그의 작품은 활달한 필력을 가미한 덕분에 영국, 인도 등 국제 미술시장에서 주목받고 있다.

정씨는 평면과 입체, 의식과 무의식, 우연과 필연, 인공과 자연, 전통과 현대 등 서로 대립적인 것을 병치하면서 해학과 유머를 만들어낸다. 흙을 매개로 한 그의 작품이 팝아트처럼 재미있게 느껴지는 까닭이다. 팬츠만 입고 관우의 얼굴 두상 조각을 쓴 사람, 얼굴만 한 선글라스를 끼고 벤치에 걸터앉은 사람, 손잡이를 사람 모형으로 만든 커피잔 등의 작품을 보면 다소 낯설지만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돈다.

현대인의 사소한 일상과 풍경을 도판에 그린 작품, 컬러풀한 색감으로 드로잉한 생활도자기 등은 긁고 파고 긋는 표현 기법 때문에 언뜻 원시 벽화를 떠올리게 하지만 현대판 문인화 같은 느낌을 준다.

정씨의 작품이 이처럼 재미있고 독특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뭘까. 작가는 중국 징더전에 있는 희귀한 흙(고령토)과 철 성분이 함유된 특유의 안료를 사용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1300도의 불 속에서 구워지는 그림은 오일이나 아크릴 물감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것을 가능케 합니다. 도판에 물감이 번지는 느낌이야말로 흙과 불의 만남이 아니면 구현할 수 없죠.”

흙의 변화무쌍한 가능성을 현대미술로 녹여내려 애쓴다는 그는 “작가의 본질은 동물적 감각으로 느낌 있는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라며 “시대정신의 전위대 역할을 하는 작가로 남고 싶다”고 말했다. 전시는 내년 2월10일까지. (02)737-7600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