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희 화백이 미국 뉴욕 유엔본부 로비에 걸린 반기문 사무총장 초상화 앞에서 작품의 제작 과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원희 화백이 미국 뉴욕 유엔본부 로비에 걸린 반기문 사무총장 초상화 앞에서 작품의 제작 과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지난 14일 미국 뉴욕 유엔본부 1층 로비에 한국인 초상화가 걸렸다. 10년 임기를 마치고 이달 말 퇴임하는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72)이 주인공이다. ‘인물화의 대가’ 이원희 화백(계명대 교수·60)이 꼬박 7개월간 작업한 작품이다. 집무실을 배경으로 지구본에 오른손을 얹고 서 있는 모습을 담았다. 유엔본부를 상징하는 푸른색 깃발과 반 총장의 푸른색 넥타이가 조화를 이루며 인물 중심인 역대 총장 초상화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림을 기증한 이 교수를 만났다.

“영·정조 시대에 꽃피웠던 사실주의 전통을 서구 고전주의 초상화와 접목해 개인의 내면세계와 우리 시대의 정신적인 좌표를 함께 담으려고 했습니다. 유명 인사들과 작업을 많이 해봤는데 반 총장은 그 누구보다도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스타일이었습니다. 가급적 제 의도에 맞추려고 노력해 줘서 작업이 수월했어요.”

계명대 미대를 졸업한 이 교수는 원래 서양화를 전공한 풍경화가였다. 이인성 이쾌대 등 대구 화단의 걸출한 선배들이 남긴 향토적 구상화풍을 계승해 인기를 누렸다. 그가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한 것은 1989년. 조선 후기 김홍도와 이명기가 함께 그린 선비 ‘서직수 초상’에 감흥을 받아서다. 그는 “조선시대에는 이처럼 사실적이면서 정신까지 표현한 초상이 있었는데 지금은 왜 없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가 대상 인물의 내면을 포착하는 데 공을 들이는 이유다.

“저는 초상으로 그릴 인물과 만나 성격을 파악하고 나서야 붓을 듭니다. 초상이란 겉모습만이 아니라 그 인물의 정신과 개성까지 표현해야 하기 때문이죠. 그러려면 대상 인물을 많이 보고 스케치하는 게 중요합니다. 반 총장은 지난 4월 뉴욕을 방문해 세 차례 만났습니다. 내면의 개성과 성격을 포착하기 위해 수백 장의 사진을 찍었고, 5월 말 서울에 온 반 총장에게 초안을 보여주며 전체적인 분위기나 포즈, 표정 등에 대한 의견도 들었고요.”

이 화백은 “가까이서 관찰해보니 반 총장은 다정다감하고 부드러운 포용력과 자신감, 서민적인 감성을 가진 인물이라는 게 느껴졌다”며 “그런 점을 화면에 담으려 노력했다”고 설명했다.

반 총장의 초상화 작업은 올 1월 박명자 갤러리현대 회장이 제안해 맡게 됐다. 이 화백은 “유엔본부 로비에 걸릴 그림은 한국의 국격을 드러낸다고 생각하니 나의 모든 것을 털어 작업에 매진하겠다는 각오가 생겼다”고 했다. 초상화를 공개한 날, 반 총장은 “실물보다 젊고 좋게 그려졌다”며 만족해했다고 한다.

이 화백은 전통 규범에 얽매이지 않고 인물의 자세를 자유롭게 표현하면서도 개성을 정확하게 드러내는 인물화가로 유명하다. 삶의 흔적과 정신이 지문처럼 남은 그의 초상화는 각계 유명 인사들의 잇단 ‘러브콜’을 받았다. 1997년에 김영삼 당시 대통령 초상화를 그려 주목받았고, 노태우 박근혜 등 전·현직 대통령과 이건희 삼성 회장, 윤관·이용훈 전 대법원장, 김재순·이만섭·김수한·박관용·임채정 전 국회의장 등 수많은 명사의 초상화가 그의 손끝에서 완성됐다.

“각계 지도자의 얼굴에는 평범한 사람들에게선 느낄 수 없는 점이 있습니다. 정치인들의 얼굴에서는 카리스마 같은 느낌을 더 많이 받았죠. 매스컴에 자주 등장해 친근해서 그런지 누구와 닮았는지도 금방 파악되고요. 김영삼 전 대통령의 초상화를 그릴 땐 얼굴 빛깔, 눈동자에서 나오는 빛의 강도를 데생하는 데 중점을 뒀습니다. 이건희 회장은 도시적 이미지에 이목구비가 잘 생겼다는 느낌을 받았고요.”

‘대단하신’ 분들을 그리자니 이런저런 주문이 많지 않을까. 이 화백은 “주문자의 입맛에 맞게 그린 초상화, 너무 좋게 포장된 초상화는 금물”이라고 단언한다. 그는 “초상화를 제사나 장례에 사용하는 영정과 동일시하는 현실이 안타깝다”며 “도상(圖像)과 표현의 다양화를 통해 친숙한 장르로 자리잡도록 노력하겠다”고 강조했다.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