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쇄공간 활용해 인간 심리 극명하게 드러냈죠"
넓이 64㎡의 벙커 안에 들어서자 천장에서 흙더미가 떨어졌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 참호를 배경으로 한 연극 공연장이다. 독일군 저격수 역을 맡은 배우 이석준이 벙커에 무단 침입한 영국군과 몸싸움을 시작하자 관객들은 그가 휘두르는 장총에 맞을까 몸을 피해야 했다. 배우와 관객의 거리는 불과 50㎝. 관객들은 마치 독일군 참호에 갇힌 듯 작품 속으로 빠져들었다. 국내 연극계에 ‘밀실 열풍’을 불러일으킨 영국 연출가 제스로 컴튼(28·사진)의 세 번째 국내 공연 작품 ‘벙커 트릴로지’다.

컴튼은 올해 시카고의 허름한 호텔방을 배경으로 한 ‘카포네 트릴로지’, 영국 콘월 해역 블랙록 등대를 배경으로 한 ‘사이레니아’를 대학로에서 공연해 연일 매진 행진을 벌였다. 지난 6일 서울 연건동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 소극장에서 공연을 시작한 ‘벙커 트릴로지’를 보러 방한한 그를 대학로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내년 2월19일까지 서울 연건동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에서 공연하는 연극 ‘벙커 트릴로지’.
내년 2월19일까지 서울 연건동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에서 공연하는 연극 ‘벙커 트릴로지’.
“‘밀실 연극’은 현실적인 이유에서 시작됐어요. 신생 회사였기 때문에 대형 극장을 빌릴 돈이 없었거든요. 창고, 사무공간 등 공연할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찾아가 연극을 올렸습니다. 그런데 의외로 관객들이 이 새로운 경험을 즐기더라고요. 참호와 등대, 호텔방에 갇혀 배우들과 함께 호흡하는 과정에서 관객은 극도의 긴장감을 느끼게 됐죠.”

장소에 맞게 인간 심리를 극단으로 몰고가는 주제를 택했다. 전쟁, 살인·실종 사건 등을 주로 다룬 이유다. “폐쇄된 공간은 인간의 심리를 극명하게 드러냅니다. 극단적인 환경에 몰렸을 때 진실이 나오는 법이니까요. 공간은 색다르지만 그 안에서 인간의 보편적인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습니다.”

‘벙커 트릴로지’는 1차 대전 당시 영국군과 독일군 벙커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아서왕의 전설, 아가멤논 신화, 셰익스피어의 비극 ‘맥베스’를 모티브로 풀어냈다. 메시지는 분명하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분이 무의미해진 전쟁은 가족뿐만 아니라 인간의 영혼까지 파괴한다는 것. ‘벙커 트릴로지’는 그의 첫 출세작이 됐다. ‘밀실’은 이제 그의 트레이드마크다.

작품을 올리는 과정에서 수익에 문제도 있었다. 워낙 좁은 공간에서 공연을 하다 보니 관람 인원이 너무 적어서다. 그는 고육지책으로 같은 배경으로 다른 인물들의 이야기를 다룬 옴니버스식 3부작(트릴로지) 시리즈를 연출했다. 관객은 더욱 열광했다. 인간의 다양한 면모를 서로 다른 관점에서 볼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제약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창조성이 싹튼 셈이다. 그는 “내년 한국에서 공연할 ‘더 프런티어 트릴로지’ 시리즈의 경우 세 가지 작품 중 어떤 것을 먼저 보느냐에 따라 작품 해석이 달라진다”며 “1, 2, 3편을 모두 본 관객이 다시 1편을 보러 오는 이유”라고 귀띔했다. 공연은 내년 2월19일까지.

고재연 기자 ye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