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품 경매회사 K옥션의 서울 강남구 신사동 사옥 앞에는 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삼층석탑이 우뚝 서 있다. 이 석탑은 1990년대부터 서울 원서동 한국불교미술관 앞마당에 있다가 13일 열리는 K옥션의 겨울경매에 출품돼 이곳으로 옮겨졌다. 높이 4.7m인 이 석탑은 당시 조형 양식을 잘 반영한 문화재급 석조물이다.

2011년에는 건축가 김중업(1922~1988)이 설계해 1967년 준공된 한국미술관(옛 주한 이탈리아 대사관)이 서울옥션 경매에 추정가 300억원으로 출품됐다. 비록 유찰됐지만 대형 건축물을 법원 경매가 아니라 미술품 경매로 매각하려는 국내 첫 시도여서 화제가 됐다.

아일랜드 출신 건축가 에일린 그레이의 330억원대 디자인가구 '드래건 의자'.
아일랜드 출신 건축가 에일린 그레이의 330억원대 디자인가구 '드래건 의자'.
옛 석조문화재와 근현대 건축물을 비롯해 공예품, 가구, 조명, 보석 등 다채로운 디자인 작품이 미술시장에 점차 편입되면서 급성장하고 있다. 크리스티와 소더비를 비롯해 서울옥션, K옥션 등은 디자인 경매를 잇달아 열고 ‘틈새 시장’ 공략에 나서고 있다. 화랑과 미술관들도 디자인 관련 기획전을 늘리는 추세다. 디자인 작품의 소장 가치와 재판매 가능성이 높아진 결과다. 미술평론가 김종근 씨는 “디자인 작품은 그림에 비해 경기의 영향을 덜 받는 데다 미술품 양도세 부과 대상에서 제외된 ‘상품’이어서 안목에 따라 큰 수익을 올릴 수 있다”며 “경제 사정상 고가 작품은 살 수 없어 상대적으로 저렴한 작품 가운데 소장 가치가 있는 디자인 제품을 구입하려는 심리가 시장에 투영돼 있다”고 분석했다.

◆미술품 경매사, 디자인 시장 ‘눈독’

미술계에 디자인 시장은 개척해야 할 ‘블루오션’이다. 불황이 장기화하고 있는 데다 미술품 애호가가 늘지 않는 상황이어서 성장 중인 디자인 시장이 매력적일 수밖에 없다. 미술품 경매회사들이 매년 디자인 경매를 여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유아모자 '굴레'
유아모자 '굴레'
크리스티는 올 들어서만 디자인 작품 관련 경매를 여섯 차례 열었다. 지난 2일 뉴욕에서 열린 경매에서는 출품작 385점 가운데 300점이 팔려 낙찰률 78%, 낙찰총액 220만달러(약 25억원)를 기록했다. 12일에는 뉴욕 록펠러플라자에서 20세기 유명 디자이너들의 가구와 조형물 150점을 경매에 부친다. 국내에서는 서울옥션이 2010년 4월 처음으로 디자인 경매를 시작했다. 최근에는 자회사 ‘서울옥션블루’를 통해 그림은 물론 보석, 가구, 토이, 빈티지 오디오 등으로 대상 품목을 넓히며 디자인 시장을 공략 중이다.

전시회도 줄을 잇고 있다. 가나문화재단은 오는 15일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최순우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을 기리는 ‘조선공예의 아름다움’전을 시작한다. 최 전 관장은 조선시대 공예의 높은 미의식과 풍부한 소재를 인식하고 이를 대중과 미술사학계에 널리 알린 선구자다. 18세기에 제작된 ‘화각장생문함’, 종이를 꽂아 보관하던 ‘죽제지통’ 등 공예품 650점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보여준다.

‘현대 건축의 아버지’ 르 코르뷔지에의 건축 디자인 작품 500여점은 내년 3월26일까지 서초동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오스트리아 크리스털 브랜드인 스와로브스키의 디자인 작품 60여점은 통의동 아름지기(15일까지)에서 만날 수 있다. 11일 서울 한남동 디뮤지엄에서 막을 내린 에르메스의 패션 디자인 명품전 ‘파리지앵의 산책’에도 수천명의 애호가가 몰려 눈길을 끌었다.

◆공예디자인 장터·비엔날레도 인기

‘화각장생문함’
‘화각장생문함’
공예디자인의 진화 과정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장터와 비엔날레도 생겨났다.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지난 8~11일 열린 ‘2016 공예트렌드페어’와 ‘서울디자인페스티벌’은 공예와 디자인 예술의 과거와 현재를 조명하고 미래 방향성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예술로 진화한 공예품부터 기업이 공예작가와 손잡고 생산한 제품, 국내외 주요 갤러리가 내놓은 작품과 상품 등을 690여개 부스에 전시해 3만여명의 관람객이 다녀갔다. 내년 9월 열리는 청주 국제공예비엔날레는 세계적인 공예디자인을 한자리에서 감상할 수 있는 기회다.

배혜경 크리스티코리아 대표는 “디자인에 열광하는 소비자들은 최신 트렌드에 민감한 것은 물론 소비도 다른 소비계층에 비해 훨씬 왕성하다”며 “회화나 조각 등의 미술품보다 단가가 낮고 새로운 소비층을 끌어들일 수 있다는 점에서 이들 제품이 미술시장의 새로운 성장동력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보석디자인 작품 '오펜하이머 블루' 560억에 팔려

공예·가구·건축…미술시장 '블루오션' 급부상
디자인 작품 가격은 최근 강세를 보이고 있다.

다이아몬드 ‘오펜하이머 블루’는 지난 5월 스위스 제네바 크리스티 경매에서 4860만스위스프랑(약 560억원)에 팔려 디자인 작품으로는 세계 최고가 기록을 세웠다. 홍콩 부동산 재벌 조지프 라우가 낙찰받은 이 보석은 직각으로 커팅한 14.62캐럿 다이아몬드로 희소가치가 높은 ‘팬시 비비드 블루’ 등급에 속한다.

아일랜드 출신 건축가 에일린 그레이의 ‘드래건 의자’는 2009년 2월 크리스티의 이브생로랑 소장품 경매에서 응찰자들의 경합 끝에 추정가보다 무려 10배가 높은 2800만달러(약 330억원)에 팔렸다. 호주 출신 디자이너 마크 뉴슨이 알루미늄과 유리섬유로 제작한 ‘등받이 의자’는 지난 4월 런던 디자인경매에서 240만파운드(약 35억원)에 팔려 화제가 됐다.

밀 자크 펄먼의 서랍장(61만달러), 카를로 몰리노의 테이블(60만달러)도 2013년 크리스티 뉴욕 경매에서 고가에 낙찰돼 눈길을 끌었다.

국내에서는 샬롯 페리앙과 장 푸르베가 함께 만든 책장 ‘도서관’이 2010년 서울옥션 경매에서 1억원에 팔려 디자인 작품 중 경매 최고가 기록을 세웠다.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