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레니엄 브리지에서 바라본 시티 오브 런던. 가운데 우뚝 솟은 건물이 세인트 폴 대성당이다.
밀레니엄 브리지에서 바라본 시티 오브 런던. 가운데 우뚝 솟은 건물이 세인트 폴 대성당이다.
시티 오브 런던임을 표시하는 기둥 모양의 상징물
시티 오브 런던임을 표시하는 기둥 모양의 상징물
런던 안에 또 하나의 런던이 있다. 시티 오브 런던(City of London)은 런던의 시작, 아니 영국의 시작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작은 지역인 시티 오브 런던이 성장해 오늘날 영국을 만든 것이다. 이 작은 도시에서는 과거와 현재가 공존한다. 로마시대 성벽을 쌓고 앞선 문화 속에 살던 로마인의 흔적을 마주할 수 있다. 또한 현재 세계의 금융 중심지로서 많은 사람이 출퇴근하는 금융가 빌딩숲도 만날 수 있다. 13세기 ‘마그나 카르타’(대헌장)를 통해 왕의 권리를 제한하고 자치권을 얻은 부자 도시. 진짜 런던, 시티 오브 런던에서 이 천년 역사를 상상하며 여행을 즐길 수 있었다. 시티 오브 런던을 보지 않고는 진정한 영국을 만났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런던 속 런던’ 시티 오브 런던

시티 오브 런던의 역사는 서기 43년 로마군 점령에서 시작됐다. 템스강을 거슬러 온 로마군은 런던 지역 강변에 로마식 건물과 성벽을 만들었다. 이곳이 라틴어로 ‘론디니움(Londinium)’이었고, 시티 오브 런던의 옛 지명이다. 예전에 지어진 로마 성벽은 일부를 제외하고 거의 사라져 지금은 경계를 찾기 어렵다. 하지만 빨간 십자가가 그려진 상징 로고를 만나면 작은 런던인 시티 오브 런던에 진입했다는 것이다. 로고 안에 ‘DOMINE DIRIGE NOS’라는 라틴어 문구가 새겨져 있는데 ‘주여, 우리를 인도하소서’라는 뜻이다. 우리가 아는 영국의 수도 런던은 ‘그레이터 런던(Greater London)’이다. 그레이터 런던은 총 33개 지역으로 돼 있고 그중 하나가 ‘시티 오브 런던’이다. 시티 오브 런던은 ‘스퀘어 마일(Square Mile)’이란 별명을 갖고 있다. 겨우 1평방마일(약 2.59㎢) 밖에 안 되는 템스강에서 런던 월까지의 작은 구역이기 때문이다.

토스트, 소시지 등이 곁들여진 영국식 아침 식사
토스트, 소시지 등이 곁들여진 영국식 아침 식사
이 작은 지역에 주목하는 이유는 금융의 중심지이기 때문은 아니다. 런던이 시작된 곳 ‘진짜’ 런던이 바로 이곳이기 때문이다. 시티 오브 런던은 별도의 정치, 경제 특별 자치구역이며 시장(Lord Mayor)도 따로 선출한다. 하나의 독립 도시인 것이다.

시티 오브 런던이 자치권을 행사한다는 것은 13세기 존 왕의 횡포에 대항해 만든 마그나 카르타 문서에서도 확인된다. 가장 대표적인 특권은 지역 내에서 받은 세금을 독자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거주 인구가 7000명밖에 되지 않는 이 작은 도시는 현재는 세계 금융과 비즈니스의 중심지다. 도시 안에는 1만개가 넘는 회사가 있으며 30만명이 출퇴근하고 있다. 시티 오브 런던의 2013년 세금 수입은 서울의 10배나 된다.
런던의 상징이자 명물인 런던버스
런던의 상징이자 명물인 런던버스
런던의 역사와 함께한 세인트 폴 대성당

시티 오브 런던은 오래된 도시인 만큼 볼거리도 풍성하다. 런던 지하철의 세인트 폴 역을 나와 조금 걸으면 세인트 폴 대성당을 만날 수 있다. 이 대성당은 시티 오브 런던의 중심부에 있다. 세인트 폴 대성당은 7세기에 건립된 후 런던 대화재로 완전히 불타 버렸다. 1666년에 일어난 런던 대화재는 지금까지도 사람들 입에 오르내릴 정도로 엄청난 화재 참사였다. 불은 일요일 새벽 2시께 한 공장에서 시작됐다. 초기에 불을 진압하지 못해 도심으로 불이 옮겨 붙으면서 4일 만에 1만3000채가 넘는 집이 불타버렸고 7만명이 넘는 시민이 집을 잃었다. 당시 도시 80%가 불타 잿더미가 됐으니 참으로 엄청난 재난이었다.

중심지에 있던 세인트 폴 대성당도 화마를 피할 길이 없었고 전소된 이후 건축가 크리스토퍼 렌이 35년을 투자해 재건축했다. 성당 앞에는 런던 대화재 때 화재를 진압하던 소방관을 기리는 동상이 세워져 있다. 다시는 화재가 없길 바라는 마음을 담은 듯 동상은 성당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세인트 폴 대성당은 영국 국교회 성당으로 로마 가톨릭 성당들과는 조금 다르게 현대적이고 차분한 느낌의 건축물이다. 찰스 왕세자와 다이애나 왕세자비가 이곳에서 결혼했으며, 원스턴 처칠, 넬슨 제독, 나이팅게일 등 영국 유명인사 200여명이 안장된 곳이기도 하다. 이 성당은 로마 베드로 성당, 피렌체 성당과 함께 세계 3대 성당으로 불린다.

런던(영국)=이왕재 여행작가 proalex@naver.com

템스강과 밀레니엄 브리지의 풍경
시티 오브 런던 중심지에 있는 밀레니엄브릿지를 관광객들이 건너가고 있다.
시티 오브 런던 중심지에 있는 밀레니엄브릿지를 관광객들이 건너가고 있다.
성당 남쪽으로 약 5분 정도 거리에 템스강과 밀레니엄 브리지가 보이고 다리 맞은편에는 테이트모던 갤러리 건물이 놓여 있다. 다리 위로 올라가 동쪽을 바라보면 바로 앞에 런던 브리지, 멀리 초고층 건물 더 샤드와 타워 브리지가 보인다. 밀레니엄 브리지의 정식 명칭은 ‘런던 밀레니엄 풋브리지(London Millennium Footbridge)’다.

밀레니엄 브리지는 21세기를 맞이해 만들어진 다리다. 과거와 현재를 연결한다는 의미로 지어졌다고 한다. 차량은 건널 수 없으며 오직 사람들만 건너게 건설된 현수교다. 이 다리는 걷는 이들이 경치를 충분히 즐길 수 있도록 줄 높이를 최대한 낮춰 놓았다. 완공 후 한동안 흔들림이 너무 심해 잠정 폐쇄됐다가 보강공사를 통해 2년 만에 다시 개방했다. 런던 사람들은 이 다리를 ‘흔들거리는 다리(wobbly bridge)’라고 부른다.

복합 문화 공간인 바비칸 센터

복합문화센터인 바비칸 센터의 테라스
복합문화센터인 바비칸 센터의 테라스
시티 오브 런던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 중 하나는 ‘바비칸 센터(Barbican center)’다. 바비칸은 성 방어를 위한 망루, 탑을 의미한다. 그래서인지 센터 내부로 들어가는 길이 복잡하고 찾기 어렵다. 바비칸이라는 의미 그대로 마치 요새처럼 느껴졌다. 바비칸 센터는 런던의 복합 문화 센터로 원래는 2차 세계대전 당시 폐허가 된 자리였다. 1982년 건축된 바비칸 센터는 주거, 문화, 교육이 한자리에서 이뤄지도록 설계됐다. 내부에는 콘서트홀, 극장, 갤러리, 도서관 등 시민 편의시설이 가득하다. 잘 알려진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홈 공연장이기도 하다. 바비칸 센터 건물 내부를 걷다 보면 노트북과 책을 펼쳐 놓고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든 사람들을 흔하게 목격한다. 이들은 실내 조형물과 어우러져 바비칸 센터를 구성하는 것 같았다. 건물을 벗어나 야외 테라스로 나가면 넓은 테라스 옆으로 연못이 있는데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 작은 배 위에 두 여인이 앉아 서로 열렬히 키스를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여인들의 옷차림을 보니 옛날 복장을 하고 있었다. 아마도 일종의 행위 예술을 하는 것 같았다.

시티 오브 런던의 역사를살펴볼 수 있는 런던박물관
시티 오브 런던의 역사를살펴볼 수 있는 런던박물관
던 박물관으로 가기 위해 미로 같은 건물 사이를 지나며 왜 바비칸 센터가 브루탈리즘(Brutalism) 건물인지 이해가 됐다. 브루탈리즘은 전통적으로 우아한 미를 추구하는 서구 건축에 반해 야수적이고 거칠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바비칸 센터는 가공하지 않는 재료와 설비, 노출된 콘크리트, 그리고 형식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콘크리트 재료가 거칠게 노출된 건물이지만 쾌적하고 햇볕이 잘 드는 기능적 공간이 인상 깊었다. 바비칸 센터에서 본 동성애 퍼포먼스나 브루탈리즘 건물에서 런던의 자유로움과 독특함을 느낄 수 있었다.

바비칸 센터 끝자락에서 런던 박물관을 만났다. 런던의 매력 중 하나는 대부분의 전시 시설이 무료라는 점이다. 이곳 역시 무료였다. 박물관에서는 시티 오브 런던의 형성 과정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특히 로마시대 도시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었다. 시티 오브 런던의 상세한 기록과 유적을 갖고 있는 런던이 문득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로마시대 건설된 런던 월(Wall) 유적을 바라보며 과거를 생각해 보았다. 기원전 55년 템스 강변에 왔다가 돌아간 카이사르, 서기 45년 4만의 군대를 보내 이곳을 점령한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그려졌다. 이 시기에 브리타니아(영국의 옛 지명)가 로마에 의해 만들어졌다.

시티 오브 런던은 작지만 풍성했다. 한나절 걸으면 돌아볼 수 있었지만 그 안에 숨겨진 역사는 수천년을 넘어선다. 시티 오브 런던은 영국 여행의 출발지이자 종착역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런던(영국)=이왕재 여행작가 proalex@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