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장이 들려주는 책 이야기] 넉넉하지 않아도 따뜻했던 어린 시절 우리네 이야기
어릴 적 놀이터는 헌책방이었다. 내가 살던 동네는 광주에서 이름난 헌책방 거리였다. 동네 친구 중 헌책방을 하는 집도 여럿 있었다. 친구 영숙이의 부모님도 헌책방을 했다. 친한 친구인지라 책방을 내 집처럼 들락거렸다. 늦은 밤, 셔터가 내려진 책방에서 영숙이와 함께 읽던 책은 침이 꼴딱 넘어가게 맛났다. 엄마를 비롯한 동네 아줌마들도 책방에 둘러앉아 군고구마를 먹으며 이야기꽃을 피우곤 했다. 동네 사랑방이나 다름없었다.

중학생이 되자 엄마는 영숙이네 책방에서 참고서를 사주었다. 새것이나 다름없다고 건네주는 책 표지에는 팔고 간 주인 이름이 대문짝만 하게 쓰여 있었다. 내 이름을 쓸 자리가 없었다. 이유 없이 주눅이 들었고, 학교 친구들이 누구 참고서냐고 물을까 봐 걱정됐다. 한마디로 창피했다.

“표지는 상관 없시야. 속만 알차믄 공부하는 디는 아무 지장 없당게.”

엄마는 서툰 목수가 연장 탓한다며 공부나 열심히 하라고 했다. 하지만 같은 반 친구들이 책상에 펼쳐놓은 빳빳한 새 참고서에 기가 죽었다. 자신의 이름을 크게 써 놓은 참고서가 마냥 부럽기만 했다. ‘진짜’ 세상과 맞닥뜨리며 내 보통이 보통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됐을 때 나는 감추고 싶었다.

[도서관장이 들려주는 책 이야기] 넉넉하지 않아도 따뜻했던 어린 시절 우리네 이야기
동화 작가로 친숙한 유은실 작가의 첫 청소년 소설 《변두리》를 읽는 동안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같은 반 영미에게 선지가 든 들통을 들키지 않기 위해 약수라 둘러대는 수원의 모습과 남의 이름이 적힌 참고서 표지를 구멍 나게 지우던 내 모습이 겹쳐 보였다. ‘내 삶의 중심, 변두리에게’로 시작되는 이 소설은 서울 황룡동(가상의 변두리 동네)에 사는 사춘기 소녀 수원이 바라본 세상을 이야기하고 있다. 태어나 처음으로 도살장의 살풍경을 본 날, 수원은 ‘진짜’ 세상과 맞닥뜨리며 그 세상으로 한 발 내디딘다.

책에 나오는 황룡동은 금천구와 많이 닮았다. 사실 금천구는 작가가 자란 곳으로, 황룡동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른다. 들통을 들고 콜라공장 정문 앞 건널목에 서서 소방서를 건너다보는 수원의 모습이 눈앞에 생생하게 그려졌다.

“살코기는 껍데기야. 살도 갈비뼈도 내장을 감싸고 있는 껍데기라고. 우리 황룡동에서는 허접스러운 껍데기를 먹을 필요가 없지. 우리가 만날 먹는 이게 바로 소의 알맹이 아니냐.”

엄마는 배에서 손을 떼곤 결연히 내장국을 가리켰다. 팔다 남은 내장과 버려진 배춧잎을 넣고 끓인 내장국이 엄마의 숙고 끝에 당당히 선택된 거라니! 그 순간만큼은 엄마가 내장 허드렛일을 하는 것도 부끄럽지 않았다. (33쪽)

내가 그렇게 감추고 싶어 하던 헌 자습서는 껍데기에 불과했다. 헌책이라도 때에 맞는 동화책과 소설책을 사주던 엄마가 있었고, 심야 자율학습을 마치고 밤늦게 하교하는 딸을 날마다 마중 나온 아빠가 있었다. 수원이 엄마 말대로 나는 이 알맹이를 받아먹고 컸으며, 이 알맹이는 세상을 헤쳐나가는 버팀목으로 내 맘속에 단단히 자리 잡고 있다.

넉넉하진 않지만, 서로를 껴안고 치열하게 살아가는 사람들. 껍데기가 중요한 세상에 허접스러운 껍데기가 아니라 알맹이를 선택한 그들은 절대 남루하지 않다. (유은실 지음, 문학동네, 228쪽, 1만1000원)

김은진 < 서울 금천구립시흥도서관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