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낙원동 허리우드극장, 관수동 서울극장, 제주 노형동 한라아트홀 등에서 공연하는 비언어 공연 ‘페인터즈:히어로’. 펜타토닉 제공
서울 낙원동 허리우드극장, 관수동 서울극장, 제주 노형동 한라아트홀 등에서 공연하는 비언어 공연 ‘페인터즈:히어로’. 펜타토닉 제공
지난달 26일 오후 서울 충정로난타극장. ‘난타’ 공연을 보러 온 중국인 관광객(유커) 40여명이 앉아 있었다. 주말이면 540석 규모의 공연장이 유커로 꽉 들어찼던 이전과는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난타 제작사인 PMC프러덕션 관계자는 “11월 들어 중국 여행사에서 단체 예약을 취소하는 문의가 잇따르고 있다”며 “중국 정부가 내린 한류 규제의 파장이 이제야 밀려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광화문 시국집회가 열리는 토요일에는 상황이 더 심각하다. 유커를 태운 대형 관광버스가 공연장에 접근하지 못해 예매자의 20%만이 공연장을 찾았다.

◆지난달부터 공연 관광객 ‘뚝’

중국 한류 규제·시국집회·가격 덤핑…공연관광 시장 '3중고'
‘쇼핑 관광’의 대안으로 떠올랐던 공연관광 시장이 연말 성수기를 앞두고 꽁꽁 얼어붙고 있다. ‘난타’ ‘페인터즈:히어로’ ‘점프’ 등 유커 대상의 비언어 공연 시장이 △중국 정부의 한류 및 한국 관광 규제 △광화문 시국집회 △면세점의 관람료 후려치기 등으로 3중고를 겪고 있어서다. 이런 현상이 장기화되면 체질이 허약한 공연 제작사들의 도산이 이어질 것이라는 우려마저 나오고 있다.

지난 10월까지만 해도 공연관광 시장에선 ‘행복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올해 국내에서 공연을 관람한 외국인 관광객이 처음으로 200만명을 넘어서는 등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지난여름부터 중국 국경절 연휴(10월1~7일)까지는 쏟아지는 유커로 인해 공연 회차를 늘리면서까지 관람객을 수용했을 정도였다.

지난달부터 분위기가 급변했다. 중국 여행사들이 줄줄이 예약을 취소하고 있다. 한반도 사드(고고도 미사일방어체계) 배치 결정 이후 중국 정부의 한류 콘텐츠 규제가 심해지고, 저가 관광상품을 근절하겠다고 발표하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광화문 시국집회가 장기화되면서 충정로, 명동, 종로 일대에 모여 있는 공연장을 찾는 관광객도 뚝 끊겼다. 최광일 한국공연관광협회장은 “일부 공연의 경우 지난달 공연장을 찾은 외국인 관광객이 전년 동기 대비 3분의 1 이상 줄었다”고 말했다.

한국 공연의 중국 진출 기회도 막혔다. ‘점프’ ‘사랑하면 춤을 춰라’ ‘비밥’ 등 중국에서 열 예정이던 기획 공연이 줄줄이 취소됐다. ‘점프’ 관계자는 “중국 정부가 공연 심의를 미루면서 베이징에서 4주간 열 예정이던 기획 공연이 취소됐다”고 밝혔다. 지난달 중국판 ‘런닝맨’ 출연진이 중국 광저우 난타 전용 공연장을 찾아 함께 공연하는 모습을 촬영했으나 한류 규제로 ‘통편집’당했다.

◆유커, “공연은 면세점의 공짜 상품”

면세점들이 중국인 단체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 공연 관람권을 ‘미끼 상품’으로 제공하는 것도 문제다. 신규 면세점 개관으로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일부 면세점은 매장을 찾는 중국 여행사에 공연 관람권을 ‘끼워팔기’ 시작했다. ‘떨이’로 관람권을 판매하면서 정가 4만~6만원 선인 관람권 가격이 5000원까지 떨어진 곳도 있다.

공연업계 관계자는 “면세점에서 1년에 유커 30만명을 데려올 테니 관람권을 5000원에 팔라고 요구한다”며 “면세점을 통해 단체관광객 10명이 와도 제값을 주고 공연을 관람하는 개별 여행객 한 명만도 못한 셈”이라고 지적했다.

중국인 관광객 사이에 ‘한국 공연은 면세점에 가면 공짜로 볼 수 있는 프로그램’이라는 인식도 생겼다. 지난달 서울 관수동 서울극장에 ‘페인터즈’를 보러 온 유커 A씨(26)는 “어떤 공연인지는 잘 모르지만 면세점에 가면 비싼 공연도 공짜로 볼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왔다”고 털어놓았다. 이날 공연장을 찾은 73명의 유커들 손에는 면세점 봉투가 하나씩 걸려 있었다.

김용제 PMC프러덕션 대표는 “관광객들이 비싼 돈을 주고라도 오고 싶은 공연을 만들어야 하는데 찜질방 이용권, 음식점 식사권과 함께 경쟁하는 것이 국내 비언어 공연의 현실”이라고 개탄했다.

최 협회장은 “중국의 관광 규제와 면세점의 가격 후려치기 등으로 경영난을 겪는 제작사가 많다”며 “이런 현상이 지속될 경우 체질이 허약한 공연 기획사 한두 곳은 도산할 가능성이 높다”고 우려했다.

고재연 기자 ye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