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글리 필드 외부 전경
리글리 필드 외부 전경
고색창연한 구장
고색창연한 구장
시카고 컵스의 홈 구장 리글리 필드에 들어서면 100년이 넘은 야구장이 미국에 존재한다는 사실에 한 번 놀라고, (당연한 일이겠지만) 시설이 너무 낡아서 두 번 놀란다. 커다란 성채 같은 양키스 스타디움이나 떠들썩한 놀이공원 같은 다저스 스타디움에 비해 1914년 개장한 리글리 필드는 주택가 한가운데 떡 버티고 서 있는 읍내 장터 같다. 물도 새고 파이프는 녹이 슬었다. 고색창연하다는 말은 이런 때 하는 것이다. (필자는 2년 전, 100주년 기념 때 이곳에 다녀왔다. 지금은 시설이 더 현대화 됐다고 한다) 시카고시 역사 문화재인 리글리 필드는 다른 야구장들보다 유난히 푸근한 느낌이 든다.

영화 ‘수첩속의 행운’ 속 주인공 지미(오른쪽)
영화 ‘수첩속의 행운’ 속 주인공 지미(오른쪽)
구장이 낡았어도 절대로 낡지도 변하지도 않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컵스 팬의 팬심이다. 그들은 팀이 자그만치 108년간 월드시리즈에서 우승하지 못했는데도 ‘사랑스런 패배자’들이라 부르며 100년 이상 우승을 꿈꿨다. 1991년도 영화 ‘수첩속의 행운’의 주인공 지미 역시 마찬가지다. 감옥 벽안에 온통 컵스 관련 기사를 도배하고 일을 할 때도 늘 라디오로 컵스 중계를 듣는다. 지미는 출감을 며칠 앞둔 어느 날 방송국 전화 퀴즈에 운좋게 당첨된다. 상으로 LA에서 열리는 시카고 컵스와 LA 에인절스 월드시리즈 티켓을 얻게 되자, 주저없이 탈옥을 감행한다. 영화 속에서 늘 커다란 C가 새겨진 파란색 컵스 모자를 쓰고 있던 배우 제임스 벨루시를 생각하면, 그가 탈옥을 해서라도 컵스의 월드시리즈 경기를 보고 싶어 했던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외야의 담쟁이 넝쿨
외야의 담쟁이 넝쿨

내가 리글리 필드를 찾던 날 마침 경기가 없어 야구장 투어를 신청했다. 에너지 넘치는 시카고 토박이 할머니가 가이드다. 드디어 야구장 내부로 들어간다. 확 터진 공간에 마음도 탁 트이는데, 제일 눈에 띄는 것은 외야의 담쟁이 넝쿨이다. 종종 공이 담쟁이 넝쿨 속으로 들어가서 외야수들이 애를 먹는다고 한다. 게다가 담쟁이 넝쿨 안쪽은 단단한 벽돌이다. 1루와 3루의 경우 끝에 가면 파울 라인이 사라지고 그대로 벽돌 담이어서 외야나 파울 펜스에 선수들이 몸을 부딪혀 가며 수비를 하는 것은 상상하기조차 힘들다.

루프톱 좌석
루프톱 좌석
외야를 보면 주변 빌딩 옥상에 특이한 외야석이 존재한다. 바로 리글리 루프톱(Wrigley Rooftops)인데 구장 뒤쪽 길 건너편 건물 옥상에서 경기를 볼 수 있는 좌석이 설치돼 있다. 이런 좌석이 타 구장에 어디 있으랴. 더 재미있는 것은 루프톱 좌석 값이 야구장 내 좌석보다 더 비싸다는 것. 운영은 건물주가 컵스 구단과 법정투쟁까지 간 끝에 수입의 일부를 컵스 구단에 납부하는 조건으로 타협했다고 한다. 호기심에 루프톱에서 경기를 보는 것은 어떨까 싶었는데 가이드는 시야가 가리는 곳이 많아 생각보다 별로라고 한다.

바트만 좌석
바트만 좌석
할머니의 안내로 3루로 가보니 특이한 좌석이 눈에 들어온다. 번호가 113번인데 의자 전체에 시카고 컵스 스티커가 붙어 있다. 2003년 플로리다 말린스와 챔피언을 두고 혈투를 벌이던 날 이 좌석에서 경기를 관람하던 스티브 바트만이 마침 날아온 파울 볼을 건드리면서 다 이긴 경기를 역전패해 버렸다. 염소의 저주에 이어 바트만의 저주가 생긴 것인데 바로 바트만이 앉았던 좌석이라고.

수동 보드판
수동 보드판
이외에도 리글리 필드에는 미국 전역에 단 3개뿐이 없는 수동스코어 보드가 떡 하니 버티고 있다. 보드 뒤에는 아르바이트생들이 정보판을 바꿔 끼면서, 작은 구멍으로 공짜 경기를 보고 있을 것이다. 살아있는 컵스 백과사전인 할머니는 이외에도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많이 들려 주었다. 리글리 필드 바로 옆이 주택가라 그 주변에 집을 산 타 야구단 선수들이 많다고 한다. 리글리 필드에서 경기를
스키 점프 대회 사진
스키 점프 대회 사진
끝내고 편하게 집에 가기 위해서였다. 과거에는 야구장인데도 별별 이벤트가 다 열렸는데 아이스하키와 미식축구, 심지어 스키 점프 대회가 열렸고, 손수건을 던지면 벤치형 좌석 사이를 달리는 경기도 있었다고 한다.

라커룸 내부
라커룸 내부
야구 경기는 못 보았지만, 라커룸에 들어가 선수들의 손때 묻은 물건과 잘 다려진 유니폼을 보니 선수들을 만난 것처럼 가슴이 떨린다. 야구 중계석, 심지어 더그아웃에까지 들어가서 운동장의 흙을 밟아 본다. 감회가 새로웠다. 이런 곳은 야구 경기를 관람한다고 해서 들를 수 있는 장소가 아니니까.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리글리 필드 앞에 깔린 벽돌들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벽돌 한 장 한 장마다 리글리 필드를 후원한 시카고 시민들의 이름과 사연이 새겨져 있다. 벽돌 사이로 ‘생일 축하해’ ‘나와 결혼해 줘요’ 같은 소소한 일상사는 물론 ‘고 컵스(컵스 파이팅)’ ‘컵스 팬 4 ever, (영원히 컵스팬임)’ ‘충성스런 컵스 팬’ 같은 글귀도 눈에 띈다.

리글리 필드 앞길 벽돌
리글리 필드 앞길 벽돌
그 벽돌을 보면서 문득 작가 레이먼드 챈들러의 말이 떠올랐다. “챔피언은 더 이상 스트라이크존에 높고 빠른 공을 던지지 못할 땐, 자기 심장을 대신 던집니다. 그저 마운드를 빠져나가서 울어버리지 않아요.” 그 벽돌들은 지난 108년간 무수하게 자신의 심장을 던진 수많은 컵스 선수들의 마음을 받은 팬들의 흔적이기도 했다.

피를 튀기는 7차전 끝에 마침내 올해 월드시리즈 우승을 거둔 시카고 컵스. 이제 리글리 필드에는 월드시리즈 우승을 알리는 ‘1908’이란 깃발 옆에 ‘2016’을 새긴 또 다른 깃발이 휘날릴 것이다. 다시 100년을 기다린다 해도 변함없이 시카고 컵스를 아껴줄 사람들. 리글리 필드에 가서 다시금 깨달았다. 선수만이 팀의 일원인가. 팬들은 가장 위대한, 팀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심영섭 영화평론가 chinablue9@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