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602개 1만7천㎞ 달해…여유로운 단풍 감상에 최적
급조·부실 관리로 치안·환경 허술…"보호 시스템 구축해야"


올레길, 둘레길, 자락길, 나들길…. 산과 숲, 해안 할 것 없이 방방곡곡에 온갖 이름의 길이 넘쳐난다.

제주 올레길과 지리산 둘레길의 성공으로 걷기 여행이 크게 유행하자 정부와 각 지방자치단체는 앞다퉈 수많은 걷기 여행길을 만들어냈다.

본격적인 단풍철로 접어들면서 인파를 피해 고즈넉한 분위기와 단풍을 함께 즐기려고 걷기 여행길을 찾는 경우가 많지만, 길 관리가 제대로 안 돼 자칫 낭패를 볼 수 있어 주의가 필요하다.

16일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가 운영하는 걷기 여행길 종합안내 포털(www.koreatrails.or.kr)에 따르면, 전국에 조성된 걷기 여행길은 602개에 걸쳐 1만7천72㎞에 달한다.

코스로는 1천665개나 된다.

지자체뿐 아니라 문체부, 환경부, 산림청, 국토해양부, 행정자치부, 해양수산부 등 6개 중앙부처도 걷기 여행길 조성에 관여하고 있다.

대자연을 마음껏 즐기며 걷기 여행을 하라는 취지로 조성한 길이지만,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는 곳이 많아 여러 문제점을 드러낸다.

무엇보다 여행자의 안전이 가장 큰 문제다.

대표적 사례가 2012년 7월 제주 올레길에서 일어난 40대 여성 피살 사건이다.

강모(당시 46세)씨는 서귀포시 성산읍 올레 1코스에서 A(40·여)씨를 성폭행하려다 반항하자 목 졸라 살해하고 시신 일부를 훼손해 유기했다.

지난 5월과 6월 서울 수락산과 의정부 사패산에서도 여성 등산객을 살해한 사건도 잇따랐고, 2014년에는 수도권 일대에서 홀로 산에 오르는 여성만 노리고 성폭행과 강도질을 일삼은 '다람쥐 바바리맨'이 붙잡힌 일도 있다.

강력사건이 발생하면 경찰과 지자체, 정부는 대책을 쏟아내지만 그때뿐이다.

체계적이고 심층적인 분석에서 나온 대책이 아니다 보니 실효성이 떨어지고 임시방편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폐쇄회로(CC)TV 설치, 순찰 인력 배치 등이 추진됐지만 예산, 인력 문제로 중단되기 일쑤고 아예 시도조차 못 한 곳도 많다.

이러다 보니 범죄 피해 위험뿐 아니라 갑작스러운 부상이나 건강 이상 시에도 속수무책이다.

휴대전화 통화가 가능한 지역이라 해도 제대로 된 안내표지가 없어 구조대에 정확한 위치를 알려줄 수 없어 발만 동동 구르는 경우도 있다.

걷기 여행길을 운영하는 충북의 한 지자체 관계자는 "많은 지자체가 경쟁적으로 길만 만들어 놓고 아예 손을 놓은 경우가 많다"며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는 시대에는 인적이 드문 곳에서 아무런 방어장치 없이 낯선 사람을 마주치는 데 대한 적절한 대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충북 단양군 단양읍 기촌리에서 출발해 가곡면 대대리와 구만동, 보발재를 넘어 보발리에 이르는 소백산 자락길 제5코스(황금구만냥길) 일부 구간을 지난 13일 둘러봤다.

문체부와 관광공사가 주관하는 '9월의 걷기 좋은 길 10선'에 선정될 정도로 경치가 빼어나기로 이름난 곳이지만, 한낮인데도 인적은 뜸했다.

송아지재를 넘어 대대리로 접어들 때까지 위급 상황에 대비한 시설은 눈에 띄지 않았다.

큰비가 오면 금방이라도 토사가 흘러내릴 듯한 곳도 있었고, 길 바로 옆에는 '감전 위험'이란 경고 문구가 붙은 전기 울타리가 쳐져 있기도 했다.

걷기 여행길은 관리뿐 아니라 조성 과정에서도 적지 않은 문제를 안고 있다.

한국관광개발연구원은 걷기 여행길의 문제점과 개선책 연구 보고서에서 부처별, 지자체별로 제각각인 조성 원칙에 따른 노선 중복, 환경 훼손, 보행자 안전 침해, 범죄 우려 등 문제를 지적하고 통합 관리와 운영의 필요성을 제안했다.

일부 지역에서는 필요 없는 시멘트 포장을 하거나 자연을 훼손하며 철제 데크 등 시설을 무리하게 설치해 '토목공사' 논란이 일기도 한다.

마음 놓고 걸을 수 있는 길을 만들려면 땜질식 처방이 아니라 관련 법 제정을 통해 체계적인 관리 시스템을 마련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자전거 동호인 수가 늘면서 '자전거 이용 활성화에 관한 법률'(일명 자전거법)은 이미 1995년 제정됐지만, 인구가 훨씬 더 많은 걷기 여행 관련 법은 20년이 지나도록 진전이 없다.

2011년 18대 국회에서 원혜영 의원이 '걷는 길 조성 지원에 관한 법률안'을 대표 발의했으나 임기 만료로 자동 폐기됐고, 2012년 발의된 '걷는 길 조성관리 및 이용촉진에 관한 법률안' 역시 폐기됐다.

전문가들은 CCTV 설치 등은 일부 지역에서는 어느 정도 효과를 거둘 수 있지만, 일부러 호젓한 길을 찾는 걷기 여행의 특성을 감안하면 근본 해결책이 아닐뿐더러 전 구간 적용도 불가능하다고 지적한다.

민관 협력을 기반으로 한 체계적인 모니터링 시스템 구축과 전문 인력 양성, 자원활동가 투입 등을 통해 지속적으로 문제점을 찾아내고 개선책을 모색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또 개별 탐방로마다 안전수칙을 마련해 이용자들에게 미리 알려야 하며, 인적이 드문 지역은 비상탈출로를 확보하고 코스 진입 전에 이를 숙지하도록 해야 한다.

탐방로 곳곳의 시설물에 해당 장소의 위치나 관리번호, 비상연락처를 적어 여행자가 긴급 상황에 신속히 대처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도 필요하다.

사단법인 '한국의 길과 문화' 윤문기 사무처장은 "전 국토에 실핏줄처럼 흩어져 있는 걷기 여행길의 운영과 관리를 공공기관이 전담하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며 "지역 사회와 전문단체, 자원활동가를 비롯해 민·관이 유기적인 협력 체계를 갖춰야 효율적이고 안전한 길 관리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윤 사무처장은 "관광객 유치와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해 운영·관리는 고려하지 않고 길 조성에만 급급한 경우가 많았다"며 "탐방로별 특징을 고려한 이용자 안전 대책을 마련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전국종합연합뉴스) 공병설 기자 kong@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