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미술의 산증인’ 백영수 화백이 2008년작 ‘귀로’(200×360)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한국미술의 산증인’ 백영수 화백이 2008년작 ‘귀로’(200×360)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해방 직후 좌우 이념 대결로 혼란스러운 시기에 새로운 순수 조형미술을 꿈꾼 청년화가들이 있었다. 김환기 유영국 이규상이 그들이다. 당시 유행한 사실주의 화풍을 버리고 추상기법을 도입해 새로운 시대를 열자는 데 뜻을 모은 이들은 1947년 미술단체인 신사실파(新寫實派)를 결성했고, 화신화랑에서 첫 창립 전시를 열었다. 1949년 두 번째 전시에 장욱진이 참여했고, 1953년 부산 피란시절 세 번째 전시 때 이중섭과 백영수가 합류했다. 신사실파는 6·25전쟁이 휴전되고 더 이상 전시가 이어지지 못했지만 그동안 한국 미술을 이끈 원동력이 됐다. 올해 94세인 백영수 화백은 신사실파 회원 여섯 명 중 유일하게 생존한 ‘한국 미술의 산증인’이다.

그가 다음달 23일까지 서울 통의동 아트사이드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연다. 70년 미술인생에서 작품이 한 발자국 더 나아가면 보여주겠다고 공언한 노화백이 4년 만에 펼쳐보이는 작품전이다.

이번 전시에는 대표작 30여점과 함께 지난해 말부터 올해 초까지 제작한 드로잉과 콜라주 작품 25점을 걸었다. 작품에는 작가 자신을 상징하는 남자아이와 정신적 안식처인 어머니, 자아이자 벗으로 추정되는 새가 주로 등장한다. 따뜻한 사랑과 행복, 희망은 그의 단골 주제다. 어머니에 대한 향수가 담긴 1970~80년대 ‘모자상’ 시리즈는 파스텔톤의 청색조로 형체를 간소하게 드러내 기독교적 영성마저 느끼게 한다.

온 가족의 교통사고(1989), 위암수술(1994) 등을 겪은 뒤 2000년대 탄생한 ‘여백, 창’ 시리즈는 세상과의 대화를 꿈꾸는 작품이다. 거대한 여백에 작은 창문만을 그린 풍경이 이채롭다. 창(세상)과 여백(인간 내면)을 조화롭게 병치해 진정한 삶이 무엇인지를 사유하게 한다.

70여년의 화업을 ‘사랑과 희망의 산물’로 규정하는 그에게 그림은 이렇듯 포근함을 녹여내는 ‘삶의 용광로’ 같은 것이다. 고령에도 그림에 매달리는 것은 사랑과 희망을 놓고 싶지 않아서다. 경기 의정부에서 작업하는 백 화백은 요즘 그 어느 때보다 ‘미술 인생’에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화가로서 저는 행운아입니다. 다른 사람은 다 죽었는데 나만 운이 좋아 살아있어요. 이왕 산 김에 백 살까지 살아야겠어요. 4~5년 남은 동안 화가로서 젊은 생각을 잃지 않고, 열심히 그릴 겁니다.”

사람 만나는 걸 좋아하는 그는 젊은 시절 이중섭 장욱진과 가깝게 지내며 두터운 교분을 쌓았다. 지금도 이중섭의 얘기를 꺼내면 눈시울이 붉어진다.

“부산 피란시절 술집에서 중섭이(이중섭)와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하던 게 아직도 눈에 선해요. 중섭이는 말수가 적고 순진했죠. 중섭이가 부인이 고생한다며 일본에 1년만 가있으라며 보냈는데, 그때 부인이 안 갔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그는 한때 이중섭 김환기와 나란히 평가받았지만, 이후에는 그렇지 못했다. 이 때문인지 자신의 그림을 세상에 내놓는 것을 꺼렸다. 살림살이가 어려워도 좀처럼 그림을 팔지 않았다.

백 화백은 두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가 1945년 오사카미술학교를 졸업했다. 신사실파 회원들과 교류하며 한국 미술의 토양을 살찌우던 그는 1977년 프랑스 파리로 이주해 일본 아트요미우리 화랑 전속작가로 활동하다가 2011년 귀국했다.

2007년 환기미술관에서 열린 ‘신사실파 60년 기념전’과 2012년 광주시립미술관 초대전에 참가해 노화가의 열정을 보여줬다. 2012년에는 백 화백을 주인공으로 한 민병훈 감독의 영화 ‘가면과 거울’이 상영되기도 했다. (02)725-1020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