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스타프 클림트의  작품이 전시된 벨베데레 궁전.
구스타프 클림트의 작품이 전시된 벨베데레 궁전.
사람들이 오스트리아 빈을 여행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겠지만 나에게 영감을 준 것은 영화 ‘우먼 인 골드’였다. 오스트리아 유대계 금융업자의 딸이던 아델레 블로흐-바우어는 구스타프 클림트(1862~1918)의 후원자이자 뮤즈였다. 황금빛 연못에서 아델레가 수련처럼 피어오르는 모습을 표현한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의 모델이다. 클림트는 그를 모델로 수많은 그림을 그렸다. 1919년 클림트가 죽고 난 뒤 아델레는 자신의 집에 클림트를 기리는 ‘성소’를 마련했을 정도로 두 사람의 관계는 각별했다. 두 사람이 연인 관계였다고 추측하는 평론가들도 있었다.

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그의 그림들은 운명의 소용돌이로 빠져들어 간다. 아델레가 죽고 난 뒤 그의 남편 페르디난트 블로흐는 나치에게 소장한 그림을 모두 빼앗긴다. 50여년이 흐른 뒤 아델레의 조카 마리아 알트만은 클림트의 그림 다섯 점을 되찾기 위해 오스트리아 정부와 외롭고 긴 싸움을 시작한다. 나치의 박해를 피해 가족을 뒤로한 채 미국으로 탈출한 자신의 어린 시절 추억을 되찾기 위해서였다. 8년이라는 긴 싸움 끝에 그는 숙모의 그림을 되찾는다. 그림은 현재 미국 뉴욕 노이에갤러리에 전시돼 있다.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는 역사의 ‘희생물’이 된 클림트의 그림들을 통해 전쟁으로 망가진 한 가족의 삶을 조명한다. 마리아에게 오스트리아는 아름다운 예술과 가족의 추억, 전쟁의 상처가 공존하는 곳이었다. 오스트리아 빈은 클림트와 에곤 실레(1890~1918)의 도시였다. 클림트가 자주 가던 카페부터 그의 연애사, 스승과 제자의 관계였던 클림트와 실레의 대화와 발자취까지 속속들이 들여다볼 수 있기 때문이다.

클림트의 ‘키스’를 만날 수 있는 벨베데레 궁전

빈의 중심부에 자리한 슈테판 대성당의 내부.
빈의 중심부에 자리한 슈테판 대성당의 내부.
베토벤 빈 호텔이 있는 카를스플라츠(Karlsplatz)에서 트램을 타고 벨베데레 궁전으로 향했다. 트램에서 내려 3분 정도 걸어가자 옥색 지붕의 바로크·로코코 양식 건물과 프랑스풍 정원이 인상적인 벨베데레 궁전이 모습을 드러냈다. ‘좋은(bel) 전망(vedere)의 옥상 테라스’라는 이탈리아 건축 용어에서 유래했다. 1683년 오스트리아를 침략한 오스만튀르크군을 무찌른 전쟁 영웅 외젠 왕자의 여름 별장으로 쓰기 위해 지어진 궁전이다.

상궁과 하궁으로 나뉘어 있는데, 클림트의 그림이 목적이라면 상궁만 돌아봐도 충분하다. 세계에서 그의 그림을 가장 많이 소장한 곳이다. 그와 인연이 깊은 실레, 오스카어 코코슈카 등의 그림을 전시하고 있다.

구스타프 클림트의 대표작품인 ‘키스’.
구스타프 클림트의 대표작품인 ‘키스’.
이곳에서 클림트의 ‘키스’가 황금빛 아우라를 내뿜고 있었다. 꽃이 흩뿌려진 작은 초원 위에 서 있는 두 연인은 자신들을 둘러싼 금빛 아우라 안에서 서로에게 황홀하게 취해 있다. 클림트가 금박과 금색 물감을 활용해 그림을 그린 1907~1908년 ‘황금 시기(golden period)’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관람객이 가장 많이 몰려 있는 곳을 찾으면 된다. 사진 촬영은 할 수 없다. 대신 기념 촬영을 할 수 있는 공간이 따로 마련돼 있다.

구약성서 속 유디트를 팜파탈로 표현한 ‘유디트’도 벨베데레 궁전에서 만날 수 있다. 클림트 이전의 예술가는 대부분 유디트가 적장인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어버리는 행위에 초점을 맞춰 그림을 그렸다. 반면 클림트는 유디트를 승리감에 도취해 황홀경에 빠져 있는 여인으로 표현하는 데 집중했다. 가슴이 훤히 드러나는 옷을 입은 채로 유혹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 클림트의 유디트는 매혹적인 힘을 과시하며 감상자들을 에로틱한 상상으로 이끌었다. 이외에도 ‘요하나 슈타우데의 초상’ ‘아담과 이브’ ‘아테제 호수의 캄머 성’ 등 클림트의 대표작을 만날 수 있다.

클림트의 작품 ‘아담과 이브’.
클림트의 작품 ‘아담과 이브’.
실레의 그림으로는 ‘죽음과 소녀’가 있다. 애절하게 매달린 소녀와 언제든 그녀를 밀어낼 듯한 남자의 손. 전문가들은 1911년부터 1915년까지 그의 모델이자 연인이었던 발리 노이질을 향한 ‘관계의 종말’을 그린 작품이라고 분석한다.

아인슈패너와 초코 케이크가 유명한 ‘카페 자허’

미술관을 둘러본 뒤 비엔나커피를 마시기 위해 오페라 하우스 인근 ‘카페 자허’를 찾았다. 빈의 예술가와 지식인들은 단골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토론을 벌였고, 영감을 얻었다. 빈에서 가장 유명한 카페는 총 세 곳. 초콜릿 케이크인 자허 토르테와 아인슈패너(비엔나커피)로 유명한 ‘카페 자허’ ‘카페 데멜’ ‘카페 첸트랄’이다. 1968년 문을 연 카페 첸트랄은 젊은 예술가들의 아지트였다고 한다. ‘키스’의 주인공으로 추정되는 클림트의 연인 에밀리와 그가 이곳의 단골이었다. 이미 세계 다양한 종류의 커피를 선보이고 있는 한국의 카페들 덕분인지 아인슈패너는 그리 특별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살구잼으로 상큼하고 단맛을 낸 자허 토르테는 훌륭했다.

오페라하우스에서 시청으로 향하는 길에 주요 관광지가 모두 몰려 있다. 길을 따라 걷다 보면 미술사 박물관, 자연사 박물관, 레오폴트 박물관, 국회의사당, 궁정극장, 시청, 빈대학을 줄줄이 볼 수 있다. 빈대학은 클림트의 인생에서 가장 많은 비난을 받게 한 곳이다. 대학 측의 주문 의뢰를 받은 클림트는 철학과 의학, 법학을 자신의 철학대로 해석해 관능적으로 표현한 작품을 완성해 대중의 비난을 받았다. 안타깝게도 그림은 화재로 소실돼 볼 수 없다. 대신 맞은편에 있는 궁정극장에서는 클림트의 천장화를 만날 수 있다.

다른 도시에 비해 길이 굉장히 넓고 도시 구획이 잘 돼 있어 도보 여행이 즐거웠다. 기회가 된다면 자전거를 타고 녹음이 우거진 빈의 속살을 속속들이 들여다볼 것을 추천한다.

또 다른 에곤 실레의 자화상.
또 다른 에곤 실레의 자화상.
빈은 ‘실레의 도시’였다. 거리에서 클림트의 그림보다 실레의 대표작 ‘자화상’을 더 자주 마주쳤기 때문이다. 실레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레오폴트 미술관을 빠뜨려서는 안 된다. 세계에서 실레의 그림을 가장 많이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의사이던 루돌프 레오폴트와 엘리자베스 레오폴트 부부가 직접 수집한 작품 5000여점을 전시하고 있는데, 실레의 작품을 비롯해 클림트, 코코슈카의 작품을 위주로 전시한다.

에곤 실레의 자화상.
에곤 실레의 자화상.
마리아테레지아광장 뒤쪽으로 5분 정도 걸어가자 박물관 지구가 나왔다. 18세기부터 왕가의 마구간으로 사용된 이곳은 1921년 전시장으로 용도가 바뀌어 오스트리아 현대미술의 ‘메카’가 됐다. 모던한 느낌의 하얀색 박물관 앞에는 청록색 벤치 모형의 엔지스(Enzis) 의자가 설치돼 있다. 빈의 상징물 중 하나라고 한다. 오스트리아 시민은 이곳에 누워 낮잠을 자거나 책을 읽으며 저마다의 방식으로 광합성을 즐기고 있었다. 이곳에 온 목적도 잠시 잊은 채 의자에 누워 오스트리아의 햇살을 누렸다.

실레의 삶과 마주하고 싶다면…레오폴트 미술관
빈에 있는 레오폴트 미술관.
빈에 있는 레오폴트 미술관.
“저에게 재능이 있나요?”

“응, 오히려 너무 많아서 문제지.”

미술관에 들어서자 벽에는 실레가 그의 스승이자 멘토이던 클림트를 처음 찾아갔을 때 나눈 대화가 적혀 있다. 실레는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만들어간 뒤에도 지속적으로 클림트와 교류했다. 그 과정에서 두 사람은 그림을 교환하기도 했는데, 당시 클림트는 말했다. “왜 나와 그림을 교환하려 하지? 네 그림은 이미 내 것을 훨씬 더 뛰어넘는데 말이야.” 이미 거장의 반열에 올라 있던 클림트가 실레의 재능을 얼마나 인정하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실레는 인간의 육체를 통해 인간의 영혼을 표현했다. 초기에는 클림트와 ‘빈 분리파’의 영향을 받았지만, 점차 죽음에 대한 공포와 내밀한 관능적 욕망, 인간의 실존을 둘러싼 고통스러운 투쟁에 관심을 기울였다. 불안에 싸인 인간의 육체를 왜곡되고 뒤틀린 형태로 거칠게 묘사한 것이 특징이다.

그는 성(性)과 죽음을 표현해 구원에 이르고자 했다. 그의 묘사는 적나라할 정도로 솔직하고 생생하다. 함께한 일행은 “클림트의 그림에선 따뜻함이 느껴지는데, 실레의 그림은 지나치게 적나라하고 고독한 느낌이 들어 부담스럽다”고 했다. 당시에도 여인과 소녀들을 모델로 한 누드는 사회적 논란이 됐다. 1912년 노이렝바흐에서 미성년자 유인 등의 혐의로 재판을 받고 24일 동안 감옥 생활을 했다. 당시 그는 옥중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내게 예술이 없었다면 지금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나는 생을 사랑한다. 나는 모든 살아 있는 존재의 심층으로 가라앉기를 원한다.”

클림트-죽음에 대한 공포와 관능적 욕망

실레의 그림을 이해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4년간 그의 연인이자 모델이었던 발리 노이질이다. 미술관에는 실레의 대표작 ‘자화상’ 옆에 발리 노이질의 초상화인 ‘발리의 초상’이 나란히 걸려 있었다. 발리는 실레에게 헌신적이었지만 실레는 4년여의 사랑에 마침표를 찍은 ‘죽음과 소녀’를 그린 뒤 부르주아 철도 공무원의 딸 에디스 함스와 결혼한다.

실레는 1918년 클림트의 사망 후 열린 빈 분리파 전시회에서 큰 성공을 거둔다. 클림트의 후계자로 자리매김하게 된 순간이다. 이 시기에 곧 태어날 아기를 기다리며 그린 그림이 벨베데레 궁전에 있는 ‘가족’이다. 하지만 그림 속 아이는 영영 만나지 못했다. 그해 10월 그의 아내는 당시 유럽을 휩쓸던 스페인 독감에 걸려 사망했다. 그 자신도 독감에 감염돼 생을 마감했다. 아내와 배 속의 아기를 잃은 지 사흘 만이었다. 그의 나이 28세였다.

에곤 실레가 그린 ‘클림트’
에곤 실레가 그린 ‘클림트’
레오폴트 미술관에는 클림트의 그림도 있다. 그중 가장 인상적인 작품은 ‘죽음과 삶’이다. 죽음에 대한 공포와 관능적 욕망은 클림트의 작품 속에 끊임없이 등장하는 요소들이다. 작품에는 공포와 욕망이 공존한다. 죽음을 상징하는 사신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형형색색으로 표현된 꽃밭에서 꿈을 꾸며 잠들어 있는 이들이 보인다. 새 생명을 상징하는 갓난아기부터 젊은 여성, 노인까지 다양하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온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듯이.

클림트와 실레의 인생을 따라가다 보니 통유리창을 통해 건너편 현대미술관이 한눈에 들어왔다. 빈의 풍경을 액자에 넣어 또 하나의 작품으로 만든 순간이었다.

빈=고재연 기자 ye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