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옥션이 오는 27일 여는 가을 경매에 출품하는 이중섭 화백의 1954~1955년작 ‘호박꽃’(62×98cm).
서울옥션이 오는 27일 여는 가을 경매에 출품하는 이중섭 화백의 1954~1955년작 ‘호박꽃’(62×98cm).
세계 경기 침체에 따른 국제 미술시장의 성장 둔화와 이우환·천경자 위작 논란에도 부유층의 여윳돈이 미술 경매시장으로 꾸준히 들어오고 있다. 금융시장의 저금리 기조로 유동성이 풍부해지자 미술품 애호가들이 김환기, 천경자, 이우환, 정상화, 박서보 등 유명 화가의 고가 그림 구매에 나서면서 올 상반기 미술품 경매시장에 964억원의 ‘뭉칫돈’이 유입됐다.

작년 같은 기간보다 54%가량 늘어났다. 미술시장 전문가들은 경매시장에 힘을 보태는 요인으로 세계적인 단색화 열풍과 김환기 작품에 대한 관심 증가, 홍콩 미술시장 호황, 온라인 시장 팽창 등을 꼽고 있다.
[훈풍 부는 미술시장] 초저금리 '여윳돈' 경매시장 유입…김환기·단색화 열풍 이끈다
◆김환기·단색화 열풍 당분간 지속

김환기 작품에 대한 국내외 미술 애호가의 ‘거침없는 식욕’에 그의 그림값은 하루가 다르게 오르면서 시장의 판을 키우고 있다. 그의 1972년작 점화 ‘무제 27-VII-72 #228’(54억원)을 비롯해 또 다른 추상화 ‘무제’(48억6000만원), ‘무제 3-V-71 #203’(45억6000만원) 등도 40억~50억원대로 치솟았다. 서울옥션과 K옥션은 올 상반기 김환기 작품 40여점을 팔아 250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김영석 한국미술시가감정협회 이사장은 “김환기 작품이 인기를 끄는 것은 수만개의 점으로 구성된 추상화 특유의 조형성 때문”이라며 “몇 년 전만 해도 국내 컬렉터가 작품을 구입하는 사례가 많았으나 요즘은 대부분 외국인이 사들이면서 가격이 치솟고 있다”고 설명했다.

박서보의 1981년작 ‘묘법 № 1~81’.
박서보의 1981년작 ‘묘법 № 1~81’.
2012년 말부터 불기 시작한 단색화 열풍도 시장을 달구고 있다. 지난 5월 뉴욕 유명 화랑 도미니크레비와 그린나프탈리갤러리에서 동시에 개인전을 열어 좋은 반응을 보인 정상화의 100호 크기 작품은 홍콩 경매시장에서 10억원대까지 치솟으며 단색화 1세대 작가의 저력을 과시했다. 앞서 2월에는 그의 1981년작 ‘무제 81-5’가 세계 유명 작가들의 작품을 모은 소더비 경매의 ‘이브닝 세일’에 출품돼 한국 단색화의 인기를 반영했다.

‘묘법의 작가’ 박서보도 3월 런던 최대 화랑 화이트큐브갤러리에서 열린 개인전에서 출품한 16점을 전시 첫날 모두 판매해 화제를 낳았다. 박 화백은 ‘묘법’ 시리즈가 국내외 시장에서 인기를 끌자 올 들어 작품값을 세 차례나 올렸다. 1970~1980년대 그린 100호 크기의 ‘묘법’ 시리즈가 10억~15억원을 호가하고 있다. 박 화백은 이 같은 여세를 몰아 내년 1월 런던 화이트큐브갤러리에서 2000년 이후 제작한 컬러 ‘묘법’ 시리즈만을 모아 개인전을 열 예정이다.

정상화의 2012년작 ‘무제 12-3-7’.
정상화의 2012년작 ‘무제 12-3-7’.
올초 뉴욕시장에서 좋은 반응을 보인 하종현 화백의 마대 작품도 최근 경매시장에서 1억원을 호가하고 있다. 단색으로 자연의 섭리를 묘사한 윤형근(1억5000만~2억원), 닥종이를 이용해 독특한 조형세계를 개척한 정창섭의 ‘묵고(默考)’(8000만원), 특유의 ‘보송보송한’ 질감을 완성한 김기린(7000만원)의 작품값도 2년 새 50% 가까이 뛰었다.

미술계는 단색화 시장이 당분간 수그러들지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 국내외 미술계에서 박서보, 정상화, 하종현, 정창섭, 김기린, 권영우 등의 기획전을 추진하고 있는 데다 해외 컬렉터의 매수세가 이어지고 있어서다. 올 상반기 90%까지 치솟은 단색화 낙찰률은 연말까지 고공 행진을 이어갈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날로 확대되는 온라인 시장

스마트폰이나 컴퓨터를 통한 점당 1000만원 미만의 중저가 미술품 거래도 시장의 활력소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올 들어 온라인 경매를 통해 거래된 중저가 그림값은 63억6700만원에 달한다.

미술계는 연간 온라인 경매시장 규모를 120억원으로 집계했지만 통계에 잡히지 않는 각종 그림까지 포함하면 200억원대에 이를 것으로 추정한다. 지난해 전체 경매시장 규모(1880억원)에 비하면 여전히 10% 정도로 미미한 수준이지만 성장률은 온라인 경매가 월등히 높다. 모바일 기기를 통해 인터넷 쇼핑몰에서 물건을 사듯 쉽게 경매에 참가할 수 있는 데다 화랑이나 아트페어를 방문하지 않아도 미술품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미술품 소비의 접근성을 크게 높임으로써 미술 대중화와 고급 문화 향유 욕구를 동시에 충족한다는 취지에서 K옥션은 ‘K옥션 온라인’을 운영하고 있고, 서울옥션은 최근 온라인 전용 자회사 ‘서울옥션블루’를 설립했다. 온라인 경매시장이 커지면서 점차 수요자의 다양한 기호를 충족해 주는 취급 상품도 늘어나고 있다. 서울옥션은 지난 8일 마감한 온라인 경매에서 그림은 물론 인형과 피규어, 보석, 디자인 가구 등 다채로운 작품을 선보여 좋은 반응을 얻었다.

◆홍콩은 K아트의 전진기지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홍콩이 세계로 향하는 K아트 수출의 전초기지 역할을 톡톡히 했다. 서울옥션과 K옥션은 홍콩에서 잇달아 경매를 두 차례씩 열어 473억원어치(서울옥션 308억원, K옥션 165억원)의 그림을 판매했다. 작년 상반기(276억원)보다 1.5배 이상 많은 액수다. 낙찰된 작품은 대부분 추정가 범위보다 훨씬 비싸게 팔려 한국 현대미술이 아시아 시장에서 자리를 잡은 것으로 평가됐다.

고미술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국가 지정문화재까지 경매에 올라와 시장에 큰 힘이 되고 있다. 서울시 지정 유형문화재 제151호인 고려시대 불상 ‘철조석가여래좌상’은 지난 3월 서울옥션 경매에서 20억원에 낙찰됐다. 단원 김홍도의 ‘시의 도첩’(3억5000만원), 겸재 정선의 ‘성류굴’(3억5000만원)도 경합 끝에 고가에 팔렸다.

김윤섭 한국미술경영연구소장은 “저금리 현상이 지속되면서 미술시장에 들어오는 현금 비중이 크게 증가하고 있다”며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결정 이후 금융시장의 불확실성 증가로 미술품과 골동품 같은 ‘안전자산’에 대한 수요가 증가할 것으로 보이는 만큼 일부 작가의 그림 가격이 더 오를 여지가 있다”고 내다봤다.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