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 7월 말 기준 원화 최고액권인 5만원권의 발행잔액은 70조4308억원이다. 2009년 발행을 시작한 지 7년 만에 70조원을 넘었다. 화폐발행잔액은 중앙은행이 화폐를 발행한 뒤 환수된 돈을 제외하고 시중에 남아 있는 금액을 말한다. 5만원권이 전체 화폐발행잔액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금액 기준으로 76.6%에 이른다. 장수 기준으론 29.4%다. 시중에 유통되는 지폐 10장 중 3장은 5만원권인 셈이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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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일상에서 쓰이는 5만원권은 좀처럼 보기 힘들다. 올 상반기 5만원권 회수율은 50.7%. 절반 정도가 한국은행으로 돌아오지 않는다는 얘기다. 1만원권 111.2%, 5000원권 93.5%, 1000원권 94.7%보다 현저히 낮다. 5만원권이 ‘지하경제’로 흘러들어가고 있다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책마을] 그 많은 고액권 지폐는 모두 어디로 갔을까
케네스 로고프 미국 하버드대 경제학과 교수가 최근 펴낸 《화폐의 종말》은 ‘선진국 정부가 소액권이나 동전을 제외한, 또는 둘 다를 제외한 종이 화폐를 단계적으로 폐지할 때가 된 것일까?’란 질문으로 시작한다. 로고프 교수의 대답은 “그렇다”다. 그는 “종이 화폐가 오늘날 공공 금융과 재정에서 가장 핵심적인 문제가 되고 있다”며 “종이 화폐를 폐지하는 게 생각보다 훨씬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저자에 따르면 미국도 한국과 사정이 비슷하다. 신용카드와 스마트폰 지급결제가 보편화되고 가상 화폐가 등장하면서 은행권 외부에 있는 현금이 줄었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미국의 화폐발행잔액은 1980년대 이후 계속 늘어나 지난해 말 1조3400억달러에 달했다. 이 중 달러 최고액권인 100달러(약 11만원)권이 차지하는 비중이 80%에 달한다. 4인 가족이라면 100달러짜리 고액권으로 1만3600달러를 갖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지갑에 이런 고액권을 여러 장 갖고 다니며 쓰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한 조사 결과에 따르면 지갑에 100달러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5% 정도다. 그렇다면 그 많은 100달러권은 누가 소유하고 있을까.

저자는 상당수의 고액권 지폐가 불법적인 경제활동에 사용되고 있다고 추정한다. 고액권 지폐는 돈세탁, 뇌물 공여 및 수수, 마약 거래, 밀수, 사기, 테러 등 범죄활동에서 항상 중심적인 역할을 해왔다. 탈세에도 깊이 관여돼 있다.

저자는 단순히 고액권 화폐를 폐지하는 것만으로 탈세가 지금의 10~15% 수준으로 감소할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는 “세금 탈루·불법 사업을 위한 다른 길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고액권 달러의 철저한 익명성, 휴대성, 유동성, 거의 세계 어디서나 받아들여지는 통용성이 불법 행태를 조장한다는 것엔 이론이 없다”고 강조한다.

저자는 우선 100달러권을 폐지하고 순차적으로 50달러권과 20달러권을 없애자고 제안한다. 10·5·1달러권은 계속 유통시키되 궁극적으로는 동전으로 대체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100달러 이상 합법적인 거래에선 카드, 전자거래, 수표 등의 비중이 높지만 10달러 미만 소매에선 거래의 절반 이상이 현금으로 이뤄지기 때문이다.

저자는 불황 타개를 위한 마이너스 금리 정책을 제한없이 효과적으로 시행하는 데도 지폐의 단계적 폐지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지폐는 제로금리의 무기명 채권으로 볼 수 있다. 마이너스 금리가 되면 지폐 수요는 급증한다. 저자는 “마이너스 금리의 최대 걸림돌은 지폐”라며 “지폐 탓에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마이너스 금리 정책은 ‘절름발이’였다”고 지적한다. 전자화폐 거래에선 플러스 금리든 마이너스 금리든 지급 못할 게 없다.

하지만 지폐의 단계적 폐지가 ‘공짜 점심’은 아니다. 미국 정부는 국내총생산의 0.4%에 해당하는 화폐 주조 수입을 얻고 있다. 만약 지폐 폐지를 위해 시중에 공급된 지폐를 모두 사들이고자 채권을 발행하려면 국내총생산의 7% 이상을 국가부채에 추가해야 한다. 지폐는 거의 완전한 사생활 보호와 즉각적인 거래 청산, 견고한 유용함, 사회적 관습과 문화에 깊이 침투해 있는 점 등 어떤 다른 거래 수단도 모방할 수 없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저자는 지폐를 폐지하려면 고려해야 할 일이 많긴 하지만 “점진적이고 적절하게 이뤄진다면 현금 의존성을 줄인 사회의 이점이 훨씬 크다”고 거듭 강조한다. 지폐 폐지에 대한 가장 큰 저항과 반대는 ‘내가 내 돈 쓰는 내용을 공개하지 않아도 되는’ 사생활 보호 권리가 위태로워진다는 데서 나온다. 저자는 “개인의 사생활과 관련된 권리와 세금을 공정하게 걷어야 하는 사회적 필요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점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의 의견은 이렇다. 5만달러짜리 차나 100만달러짜리 아파트를 살 때는 탈세와 돈세탁, 부패 등의 문제를 줄여야 하지 않을까. 반면 소액 결제에선 지폐의 편리성과 함께 개인의 사생활을 보호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소액권은 영구히 사용하게 하거나 아니면 대안이 나올 때까지 남겨놔야 하는 이유”라고 그는 강조했다.

송태형 기자 toughlb@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