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고분벽화 속 길 잃은 사람들, 전성기 끝난 고구려 보는 듯
고구려 후기 벽화고분은 ‘사신도(四神圖) 무덤’으로 불린다. 이 시기 고분벽화 주제는 대부분 무덤 주인의 세계를 지켜주는 사신이다. 문제는 벽화에 그려진 사신들에게서 안정감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평안도 지역 진파리 1호분의 사신은 방위에 맞지 않게 그려져 있다. 사신이 수호신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없음을 뜻한다. 평양 개마총 벽화에서는 무덤 주인이 주인공인 듯한 행렬이 그려져 있는데, 다들 어디로 향하는지 확실하지 않다. 이처럼 고구려 후기 벽화고분은 화려하지만 일관성과 방향성을 찾기 어렵다. 고구려 사회가 전성기였던 장수왕 서거 후 피지배층의 불만과 불안이 곳곳에서 피어났음을 보여준다.

고구려 벽화고분은 이처럼 고구려인의 생활상부터 그들의 세계관과 내세관까지 고스란히 담고 있는 타임캡슐이다. 고구려 벽화고분 연구의 세계적 권위자로 꼽히는 전호태 울산대 역사문화학과 교수가 《고구려 벽화고분》에서 고구려 초·중·후기의 무덤과 벽화 양식을 대표하는 10기의 벽화고분을 세밀히 관찰한 이유다.

고구려 고분벽화의 역사는 고구려의 흥망성쇠와 궤를 함께한다. 427년 장수왕이 평양 천도를 단행하고 고구려 전성기의 문을 열었다. 5세기 중엽과 후반 조성된 고구려 벽화고분은 수십 기에 이른다. 평양에서 발견된 수산리 벽화고분은 전성기 고구려의 평양 문화가 지닌 세련됨을 보여준다. 평양 쌍영총에서는 남북 문화가 만나 새로운 문화를 창출해냈음이 드러난다. 집안 지역에서 발견된 장천1호분과 삼실총은 불교로 대표되는 서방 관념과 신앙이 어떻게 고구려에 수용되고 소화됐는지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다.

7세기 전후 작품인 강서대묘, 강서중묘를 끝으로 새로운 고구려 벽화고분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고구려는 당나라와 20년 이상 전쟁을 치렀다. 이런 상황에서 강서대묘에 필적할 만한 벽화고분을 만들 여유는 없었던 것이다.

고구려의 마지막 고분 벽화 중 하나인 남포지역 강서대묘 벽화는 완성도가 높고 보존 상태도 좋아 일제강점기 일본인 학자들의 관심 대상이었다. 그들은 고구려 벽화의 빼어난 회화 수준에 감탄했다.

그러면서도 고분벽화의 회화적 기법이나 내용이 중국의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고구려의 독자적인 문화 요소를 강조할수록 식민 통치의 정당성이 약해지기 때문이었다.

고재연 기자 ye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