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달 14일까지 서울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하는 연극 ‘아버지’. 국립극단 제공
내달 14일까지 서울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하는 연극 ‘아버지’. 국립극단 제공
프랑스 파리에 살고 있는 전직 탭댄서 앙드레는 고집스럽고 완고하지만 유머 있는 노인이다. 함께 사는 딸 안느는 애인 피에르와 영국 런던에 가서 살겠다고 선언한다. 잠시 후, 딸은 어떤 남자와 내 집에서 살고 있다. 그는 자신이 10년째 안느와 함께 산 남편 앙투안느라고 소개한다. 자고 일어나니 안느는 혼자다. 5년 전 이혼했다고 한다. 안느는 그가 탭댄서가 아니라 엔지니어였다고 말한다. 다음날 모르는 남자와 여자가 아파트에 들어온다. 남자가 그의 뺨을 때린다. 혼란스럽다.

서울 명동예술극장 무대에서 막을 올린 연극 ‘아버지’는 현실과 환상의 경계에 선 한 인간이 소멸해가는 과정을 그린다. 프랑스의 젊은 극작가 플로리앙 젤레르가 대본을 쓴 이 작품에서 독특한 것은 시선이다. 정신이 오락가락 하는 노인과 그로 인해 피해 받는 가족을 측은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기존의 시선은 거뒀다. 대신 치매에 걸린 아버지 앙드레의 시선으로 가족을 바라본다. 무대의 시간은 파편화한 채 흐른다. 기억과 망각, 과거와 현재가 마구 뒤섞인다. 앙드레의 조각난 기억을 더듬다 보면 아버지가 느낀 근원적 고독감 그 자체에 침전하게 된다.

망각이 깊어질수록 그의 존엄성은 조금씩 무너져 내린다. “언제까지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할 작정이세요.” 모르는 남자가 아버지에게 하는 대사처럼 말이다. 자고 일어나면 늘 잃어버리지 않았을까 전전긍긍하며 소중하게 여기는 손목시계는 그 자신과도 같다. “난 내 물건을 계속 잃어버리고 있어”라는 그의 말은 “난 나 자신을 잃어버리고 있어”라는 의미로 들린다.

극은 치매를 늘 신파로만 다뤄온 틀을 깨버린다. 한 노인의 뇌 속을 들여다보는 듯하다. 한 편의 심리 스릴러를 보는 듯한 느낌도 든다. 여성 연출가 박정희의 섬세한 연출이 돋보인다. 시간이 갈수록 무대는 조금씩 비워진다. 텅 빈 우주 속으로 침전하는 아버지를 상징하는 듯하다. 파편화한 기억의 조각을 암전으로 구분한 것도 인상적이다. 치매에 걸린 노인의 세상은 저렇게 움직이지 않을까.

“배우의 연기에 대해 그 역할에 ‘성공했다, 실패했다’로만 평가해 달라”던 배우 박근형은 앙드레 역에 성공했다. 76세 노인의 얼굴에 어느새 아이의 모습이 겹쳐진다. 아이 같은 얼굴로 웃던 그는 아이 같은 얼굴로 운다. 아버지는 그렇게 아이가 되고, 자식의 자식이 된다. 치밀한 대본과 섬세한 연출, 배우의 명연기가 빚어낸 수작이다. 다음달 14일까지, 2만~5만원.

고재연 기자 yeon@hankyung.com